<음식과 사람> 12월호

[음식과 사람 2016-12 P.84 Food & Story]

 

한겨울, 후회 없는 선택 팥죽

 

겨울철에는 뭐니 뭐니 해도 따끈한 국물 요리가 제격이지만 국물 요리를 이길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팥죽이다. 팥죽은 사계절 사랑받는 음식이지만 특히 한겨울에 먹는 팥죽은 그 맛도 맛이려니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음식이기도 하다. 팥죽을 먹는 동지의 의미는 퇴색했지만 그 맛만큼은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팥죽’의 매력에 빠져보자.

▲ 사진 = Flickr (www.flickr.com/photos/136440990@N07/22504218112)

editor 정혜윤 안산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

동지(冬至)는 1년 중 가장 밤이 길고 낮이 짧은 날이다. 어찌 생각하면 밤이 가장 길기 때문에 무서운 날이기도 할 듯하다. 만약 서양 영화에서라면 동지가 되면 지구 어디에선가 조커 같은 악당들이 나와 세상을 악의 힘으로 지배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민족은 긍정의 힘과 해학과 정이 넘치는 민족 아닌가. 모두 모여 앉아 팥죽을 나눠 먹으며 ‘밤이 가장 긴 날은 호랑이가 임신하기 좋다’는 등 호랑이 장가보낼 궁리와 해학 넘치는 이야기들로 동지의 긴긴 밤을 지새웠다. 게다가 동지에는 명절처럼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자신의 나이만큼 팥죽의 새알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고 믿으며 동지팥죽을 나눠 먹었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작은설(아세, 亞歲)’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칠흑 같던 동지를 기점으로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므로 새로운 날들이 시작된다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설 다음가는 설로 인정한 듯하다. 그래서 “동지가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하며 새해 첫날 아침에 먹는 떡국만큼이나 동짓날 먹는 팥죽을 중요하게 여겼다.

동지팥죽엔 잘 불린 찹쌀을 넣고 죽을 쑤고, ‘새알심’이라 부르는 경단을 빚어 넣는다. 새알심은 하얗고 둥근 것이 새알만큼 작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지역에 따라 ‘옹심이’라고도 한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가장 많은 새알심을 먹는데, 장수를 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팥죽을 먹고 좀 더 철이 들기를 기대했다.

이처럼 팥죽에는 참으로 인간적이면서 따뜻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필자도 동지가 되면 어김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팥죽 먹었느냐”며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동지에는 왜 팥죽을 먹었을까?

 

겨울철 탄수화물의 보고 ‘팥죽’

팥은 조리하기에 참으로 번거롭다. 아무래도 콩보다 더 불려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한 에너지원인 탄수화물이 풍부한 팥이기에 손이 더 가더라도 한겨울 몸을 웅크리는 가족을 위해 어머니의 손은 부지런해졌을 것이다. 팥은 푹푹 고아야 한다. 탄수화물이 많은 곡식이라 불 앞에서 떠나면 대번에 타버리기 때문에 삶는 동안 자리를 꼭 지켜야만 한다.

팥에는 피로물질을 분해하고 피로를 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B1이 곡류 중 가장 많이 함유돼 있어 피로 회복, 신진대사 촉진, 빈혈 예방, 스트레스 해소, 불면증 완화, 기억력 강화 등에 좋다. 예전에는 비타민B1이 부족할 때 생기는 각기병의 특효약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팥의 겉껍질에 함유된 사포닌과 풍부한 식이섬유가 이뇨작용을 활발하게 해 체내에 있는 불필요한 수분을 배출시키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칼슘, 인, 철분 등의 무기질이 풍부한 음식이다. 소화 기능이 약한 어르신들이나 아이들 등 현미나 흑미 같은 잡곡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팥을 먹으면 좋다고 한다. 식품영양 전문가들에 따르면 팥에는 탄수화물이 다량(68.4%) 포함돼 있는데, 소화가 잘되는 탄수화물이기 때문에 소화 기능이 약해 거친 잡곡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팥을 넣어 밥을 지어 먹으면 좋다고 한다.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던 ‘동지팥죽’

음식을 다루는 주방에서는 동지에 쑨 팥죽을 주방기기에다 바르고 주방 구석에 뿌리며 1년 동안의 무사고를 기원하기도 했다. 무속신앙이나 민속풍습 속에서 붉은색의 팥은 귀히 여겨졌다.

고사를 지내거나 개업식에서 빠지지 않는 팥시루떡은 흉운이나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조선 후기에 쓰인 <동국세시기>에는 6세기경 중국 양나라의 <형초세시기>에 나오는 팥죽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공씨(共工氏)에게는 말썽꾸러기 아들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었고 역질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그 아들이 살아생전에 팥을 싫어했는데, 아들이 죽은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서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더니 역질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간과 집 안 곳곳에 뿌렸다고 한다.

행운은 깃들되 악운은 떨치고 싶은 선조들의 바람이 팥죽 한 그릇으로 그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상다리 휘어지게 수라상을 차려야 한다거나 소를 잡아야 했다면 민초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는가!

말도 많고 상처도 많고 돌아봐야 할 일도 많았던 2016년이었다. 동지의 긴긴 밤 팥죽 한 그릇에 마음을 열고 지나간 일들과 새로운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동지가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좀 더 환한 빛으로 우리를 비출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뜨거운 김을 내며 한 그릇 푸짐하게 나오는 서울 광장시장 팥죽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액운이 삶에 끼어들지 않게 해줄 동지의 팥죽은 확실히 설날의 떡국보다 먼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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