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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사람 2018-7 P.44 Uncut News]

 

독도의용수비대를 아시나요?

 

▲ 이미지 = PIXABAY

editor. 김홍국 정치평론가

 

의병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이 스스로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自衛軍)을 말한다. 권력자들이 당파싸움이나 정략적인 이권 다툼에 빠져 외적의 침략을 당하고도 막지 못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떨쳐나선 것은 늘 조정이 아니라 힘없는 백성이었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라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의병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대표적인 현대사에 등장하는 첫 의병이 바로 독도의용수비대다. 독도는 일본의 영토 야욕의 대상이었다. 탐욕스러운 일본은 끊임없이 영토 확장에 나섰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일본은 늘 독도를 탐냈다. 일부 일본인은 독도에 표지석을 세우려고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도를 비롯한 온 국토가 일본에 침탈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특히 일본은 1953년 수산시험선을 독도에 보내 ‘시마네현 다케시마(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고 쓰인 나무 기둥을 독도에 세우는 등, 독도를 일본 영토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에 분노한 홍순칠 등 6·25전쟁 참전용사들과 주민 등 33명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1953년 중순 따가운 여름 햇볕 속에 독도에 모였고, 사비를 들여 구입한 각종 무기로 의용대의 대오를 갖췄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의 의병에 이은 광복 후 첫 의병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4년 8월 중순경까지 독도 서도에 독자적으로 주둔하며 독도를 경비했다. 이들은 자비로 구입한 기관총과 박격포, 소총으로 무장한 채 뙤약볕 아래서 일본 순시선이나 어선, 관측장비 등이 접근할 때마다 이를 탐지하고 격퇴하기 위한 훈련에 땀을 흘렸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진가는 1954년 8월 독도에 접근한 일본 순시선을 격퇴시킨 전투에서 나타났다. 같은 해 11월에는 독도 인근을 침범한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와 격전을 벌여 일본군 십수 명을 살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 경찰에 경비 업무와 장비 일체를 인계하면서 공식적인 수비대 활동을 종료했다. 수비대원 가운데 9명이 울릉경찰서 경찰로 특채돼 독도 경비 업무에 계속 임하며 의용수비대의 명맥을 이었다.

정부는 1996년 고인이 된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에게 국가보훈 삼일장을, 그 외의 대원들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추서했다. 또한 2005년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을 제정했고, 이 법에 따라 2008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의용수비대원으로서 독도를 지켰던 33명의 의병 중 28명이 작고해 현재 5명이 생존해 있다. 의용수비대는 요즘도 자주 벌어지는 일본의 영토 야욕과 역사 왜곡에 맞서는 의병 정신의 표상으로 역사를 빛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난 때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해 국가를 지킨 의병 정신에서 출발한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의병 정신은 독재정권과 맞선 4·19혁명, 군부독재에 저항한 5·18 정신, 1987년 민주 대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 등에 나타난 국민들의 정의로운 시민 정신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 평화를 지켜온 위대한 국민성과 나라 사랑 정신의 현주소이다. 경기침체와 과당 경쟁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국민 건강을 지켜온 외식업계 종사자들도 한편으론 대한민국을 지키는 의병들이다. 의병 정신으로 21세기에 더욱 빛나는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함께 꿈꿔본다.

 

[김홍국]

국제정치학 박사 & MBA,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으로 한국협상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경기대에서 정치학과 언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정치평론가로 YTN과 연합뉴스TV 등 방송에서 정치 현안에 대한 분석과 해설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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