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①속담 속 생선 이야기로 톺아본 우리 역사와 문화

[음식과 사람 2018-10 Discovery]

▲ 이미지 = PIXABAY

우리말에는 생선 관련 속담이 꽤 많다. 예컨대 ‘밴댕이 소갈딱지’나 ‘조기만도 못하다’는 말은 생선의 특성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하기에 무심코 흘려들었던 말 속에 뜻밖의 사실과 역사, 문화가 담겨 있는 경우도 적잖다.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한국과 일본의 상반된 전어 역사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 돌아온다.” 가을만 되면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자주 듣는 속담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다. 전어가 그렇게 맛있나?

입맛이야 제각각이니 함부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실 전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맛있다는 사람과 그저 그렇다는 사람이 반반이다. 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집 나간 며느리 돌아올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이런 속담이 생겼을까?

궁금한 김에 다른 나라도 알아봤다. 일본도 전어를 많이 먹지만 전어 굽는 냄새엔 질색한다. 멀쩡히 잘 있던 며느리가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뛰쳐나갈 정도라고 한다. 얼마나 싫은지 전설까지 있다. 옛날 일본에 노부부가 살았다. 늦둥이 딸을 낳아 애지중지 키워 이팔청춘이 됐는데, 지나던 영주가 보고 미모에 반해 첩으로 삼으려 했다. 고민 끝에 딸이 갑자기 병들어 죽었다며 영주를 속이고는 사람들 앞에서 죽은 딸을 화장키로 했다. 그리고 딸은 산속으로 보내 숨기고 대신 관 속에 물고기를 넣어 태웠다. 이때 대신 넣은 생선이 바로 전어였다. 이걸 보면 일본인이 전어 굽는 냄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 이미지 = PIXABAY

문제는 똑같은 전어 굽는 냄새에 한국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돌아오고, 일본 며느리는 집을 뛰쳐나간단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배경이 있는데 전어 이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전어는 돈 전(錢)자를 써서 전어다. 맛이 좋아 사는 사람이 돈을 아끼지 않고 사 먹기 때문에 전어가 됐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의 실학자 서유구가 <난호어목지>에 그 유래를 밝혀놓았다.

“전어는 고기에 가시가 많지만 육질이 부드러워 씹어 먹기가 좋으며 기름이 많고 맛이 좋다. 상인들이 소금에 절여 한양으로 가져와 파는데 신분의 높낮음을 떠나 모두 좋아해 사는 사람이 값을 생각하지 않고 사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한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니 값이 오르는 건 당연하지만 얼마나 비쌌기에 이름까지 전어가 됐을까 싶은데, 다행히 옛날 전어 시세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시장에서 큰 전어 한 마리에 쌀이 석 되.” 17세기 초 선비인 오희문의 <쇄미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쌀이 귀했던 광해군 때 시세이니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몇만 원은 족히 됐을 듯싶다.

오희문이라는 양반이 바가지 썼을 가능성도 있기에 다른 문헌을 찾아보니 전어값이 얼마인지 알 수는 있는데 더 황당하다. 같은 시대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조헌의 문집 <동환봉사>에 경주에서는 가을 전어를 비단 한 필을 주고 바꾸고, 평양에서는 겨울 숭어를 무명 한 필로 바꾼다고 나온다. 이 정도면 당시 전어는 거의 금값에 버금갔던 모양이다. 왜 이렇게 비쌌을까?

경주에서 전어를 비단과 맞바꾼 데는 사연이 있다. 전어는 서남해에서 잡히는 생선이다. 그런데 전어가 안 잡히는 경주에서 조정에 바치는 공물에 전어가 포함돼 있었다. 광해군 때는 세금으로 특산물을 현물로 바칠 때이니 물건이 없으면 시장에서 구해 보내야 한다. 그러니 전어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뛸 수밖에 없다.

한양에서도 전어가 부르는 게 값이 된 이유가 있다. 교통이 불편한 옛날, 서남해에서 잡힌 전어를 한양까지 운반하기란 쉽지 않았다. 반드시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광해군 때 소금값은 지금과 달라 거의 쌀값에 버금갔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떠나 원가 자체가 지금과 달랐다. 그러니 돈 ‘전’자 전어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귀하면 더 탐이 나는 법. 옛날 전어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어 굽는 냄새에 며느리 돌아올 만한데, 게다가 한 마리에 쌀 석 되나 하는 전어를 가족이 먹으려면 최소 수십 마리는 있어야 한다.

전어를 먹는다는 것은 쌀이 귀했던 시절에 쌀 한 가마니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 치운다는 뜻이니 집안 살림이 활짝 폈다는 소리다.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올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사진 = 위키피디아

반면 일본 며느리는 전어 냄새가 싫어 집을 뛰쳐나갈 정도란다. 일본 역시 이유를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말로 전어는 고노시로(このしろ)다. 어원이 밥 대신 먹는 생선(飯代魚)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옛날 우리 어부들이 곡식이 떨어지면 당시 무더기로 잡혔던 청어로 어죽을 끓여 먹었던 것처럼 일본 어부들은 양식이 떨어지면 전어를 밥 대신 먹었다. 실제 조선통신사의 기록에도 일본에선 전어가 많이 잡힌다는 글이 자주 보인다.

일본에서는 도쿄 앞바다가 전어밭이었다. 수요지와 생산지가 겹쳐 넘치게 잡혀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먹고 남은 전어는 썩혀 퇴비로 썼고, 그래도 남으면 태워 없앴다.

이러니 일본 며느리가 집을 뛰쳐나갈 만큼 전어 굽는 냄새를 싫어할 거란 말이 이해가 된다. 집에서 전어를 굽는다는 것은 곧 양식이 떨어졌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집안 망했다는 소리니 싫건 좋건 집을 나갈 수밖에 없다.

음식은 맛있어서 비싼 게 아니라 비싸서 더 맛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값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희소성일까, 아니면 입소문일까, 혹은 또 다른 무엇일까? 한국과 일본의 전어 역사를 비교해보며 든 생각이다.

 

임금님께 진상했다 파직당한 삼치?

희소성 때문에 입소문이 만들어진 한국 전어와 달리 편견 때문에 엉뚱한 소문으로 발목 잡혔던 생선도 있다. 요즘은 인기 있는 생선, 삼치 이야기다.

농어목 고등어과의 등 푸른 생선인 삼치는 살짝 기름진 데다 맛은 담백하고 육질마저 부드러워 생선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삼치는 즐겨 먹는다는 사람이 많다. 이런 생선이기에 조선시대에 임금님한테 진상했는데 도리어 삼치 때문에 파직당한 관리가 있었다. 삼치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에 새로 부임한 전라도 관찰사가 관내를 순시하던 중 한 어촌마을에 들렀다. 고을 현감이 마침 그곳에서 잡은 생선으로 회를 떠 관찰사에게 대접했는데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충성심이 대단했던 관찰사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임금님도 맛봐야 한다며 도성으로 올려보냈는데, 며칠이 지나 도착한 생선을 맛본 임금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선이 이미 상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임금이 관찰사를 파직하고, 칭찬을 기대했다가 벼슬에서 쫓겨나게 된 관찰사가 “망할 놈의 생선 때문에 망했다”며 탄식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물고기를 망어(亡魚)라고 불렀는데 발음이 불편했는지 나중에는 삼 마(麻)자를 써서 마어로 바뀌었다가 순우리말로 삼치가 됐다는 것이다. 삼치가 과연 그런 뜻일까?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를 정색해서 풀어보면 생선 때문에 인생 망친 관리가 진짜 있기는 있었다.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관청인 사옹원에서 부패해 악취가 나는 망어(䰶魚), 꿩, 오리고기를 공물로 받았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의 기록인데 상한 음식을 보냈으니 징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현지 관리가 처벌받았다.

현지 관리가 망할 생선이라고 욕해 망어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름이 망어였다. 망어는 삼치의 한자 이름이다. 그런데 삼치가 망어라는 이름 때문에 구박당했다. 조선 후기 <난호어목지>에 삼치는 맛좋은 생선으로 북에서는 마어(麻魚), 남에서는 망어(亡魚)로 부르는데 바닷가 마을에서는 좋아하지만 사대부들은 망(亡)자가 들어 있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름은 사람들이 멋대로 지어놓고 별별 핑계를 다 만들어 구박했으니 삼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삼치가 사실은 망할 생선이어서 생긴 이름이 아니라 맛이 좋아 생긴 이름이라는 점이다.

조선 후기 학자 김려의 <우해이어보>에 관련 설명이 보인다. 이 물고기는 삼차(參差)라고 읽는데 맛은 방어와 비슷하지만 더 새콤산뜻한() 맛이기에 현지인들은 참어(醦魚)라고 부르며 진미로 여긴다고 기록해놓았다.

삼치, 과연 망할 생선이어서 삼치가 된 것일까, 아니면 맛있어서 삼치일까? 옛날 사대부처럼 ‘망’자 들어간 이름만 보고 탁상공론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직접 맛보는 것이 최고일 터이다.

 

돈 없으면 빈대떡 대신 갈치를…

흔히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으라고 하는데 그건 옛날이야기이고, 지금은 빈대떡이 그렇게 만만한 음식이 아니다. 250년 전쯤인 18세기 한양에서는 또 달랐던 모양이다. 당시 속담에 돈 떨어지면 집에 가서 갈치나 구워 먹으라고 했다.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소금에 절인 갈치를 사라(不欲費錢鏹 須買葛侈鯗)”고 <난호어목지>에 적혀 있다. 갈치는 맛도 좋지만 가격도 쌌기 때문에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의미다.

▲ 이미지 = PIXABAY

정조 무렵 한양에는 갈치가 무척 흔했던 모양이다.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가 당시 한양의 모습을 읊은 시를 남겨 놓았는데 종로의 육의전 풍경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어물전에 쌓인 갈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물 가게에는 싱싱한 생선이 두껍게 살쪘으니 / 갈치, 농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라네.”

갈치가 이렇게 여러 생선과 함께 한양 사람들의 입맛을 유혹했는데 그 바람에 돈 되는 좋은 갈치는 잡아서 도성으로 올려보냈으니 다산 정약용이 어촌에서는 오히려 갈치를 먹기가 힘들다는 글을 남겼다.

“싱싱한 갈치와 좋은 준치는 모두 한양으로 올려보내고 촌마을에는 가끔 새우젓 파는 소리만 들린다.”

갈치가 서울의 시장으로 몰린 만큼 가격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관청에 물품을 납품하던 지규식이 남긴 <하재일기>에 일꾼에게 술값으로 1냥 5전을 지급했는데 1냥은 안주인 갈치값이라고 했다. 한 냥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밤에 참외 1냥 어치를 사 먹었다고 한 것을 보면 갈치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바다는 갈치가 많이 잡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 년 열두 달 모두 잡혔으니 <임원경제지>에는 동해와 서해, 남해에서 모두 갈치를 잡는데 계절에 따라 많이 잡히는 지역이 다르다고 나온다.

그런 만큼 갈치는 오랜 세월 서민의 사랑을 받았다. 소금에 절이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운반도 쉬운 데다 값싸고 맛도 좋아 옛날부터 모두가 즐겨 먹었기에 돈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소금에 절인 갈치를 사 먹으라는 말이 생겼다.

그런데 갈치가 이렇게 흔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잘못된 편견까지 생겼다. 갈치뿐만 아니라 멸치, 꽁치, 가물치 등 ‘치’자 들어가는 생선이 무더기로 받았던 오해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보면 한자로 물고기 어(魚)자가 들어가는 생선은 고급 어종인 반면 한글로 치로 끝나는 생선은 저급 생선이니 싸구려 물고기라는 소리를 한다. 또 갈치나 삼치, 꽁치 같은 치자로 끝나는 생선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이 밖에도 일일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다양한 말이 있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어’는 생선 이름의 한자 표기, ‘치’는 한글 표기일 뿐이다.

순한글 생선 이름은 치, 이, 미 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말 어원을 밝힌 <아언각비>에서 우리말 생선 이름에는 ‘치’자가 들어간다면서 준치, 날치, 갈치, 멸치 등을 예로 들었다. 국립수산과학원의 연구논문에도 치자로 끝나는 생선 이름은 대부분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자주 먹거나 봐왔던 친숙한 어류였다고 밝히고 있다. 예부터 모두가 즐겨 먹던 생선이기에 생활 속 언어에 한자어 대신 고유어가 남아 있는 것이니 치자 들어가는 생선 이름이 결코 낮잡아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양반부터 서민까지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았고, 현대에는 남획으로 귀하신 몸이 된 갈치가 들으면 웃을 일이다.

 

저작권자 © 한국외식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