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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솥 열고 막 푼 ‘아부지밥’푸드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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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26  14: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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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사람 2018- 12 Food Essay]


밥솥 열고 막 푼 ‘아부지밥’

 

   

 

editor   윤동혁

 

30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 무렵 서울 살 때나 그 뒤로 횡성, 양평, 원주 등지로 흘러 다니며 시간 부스러뜨리는 세월 속에서 여태 내가 단골로 찾아가는 집은 단 한 곳, 남원집뿐이다.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서 어느 골목길을 더듬어가다 보면 막혀서 더 갈 수 없는 곳에 (지금은 헌법재판소 맞은편) 그 집이 있었다, 어쩌다 그 집을 알게 되었을까.

장애인 관련 신문 편집인 안 아무개가 나를 끌고 갔을 것이다. 늘 빚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니던 인물인지라 아마 술값을 내게 떠넘기려는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 집은 서울에서 몇 안 남은 ‘주막’ 칭호가 어울리는 곳이었고, 여주인은 어렸으나 ‘주모’라 불러도 좋을 만큼 손님을 잘 ‘요리’했다. 그곳에서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 떠난 김근태 형님을 보았고,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에게 인사드리기도 했다. 

젊고 예쁜 주모에게 수많은 사내들이 수작 또는 연애감정을 날려 보냈으나    (그녀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그 긴 세월 동안 이쑤시개만 한 스캔들도 만들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이 시대의 주모라 불러도 되겠다. 

그런데, 30년 단골인 나는 이 주모에게 연정을 품어본 사실이 없고 또 역사를 자랑한다는 이 집의 소문난 ‘국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나에게 남원집은 국밥집이 아니라 언제나 술집이었을 뿐이다. 홍어삼합이 나오고 여름엔 민어회, 겨울엔 굴전을 막걸리와 함께 맛보는 주점이었지 끼니를 해결하는 밥집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굳이 지키려 하지도 않았던 그 견고한 전통이 30여 년 만에 깨졌다. 술을 마시면서 충전시키던 손전화를 그냥 놓고 나온 채 여관으로 갔던 것이다. 오전에 그 집을 찾아간 건 처음이었고 그냥 나오기도 뭐해서 아침 겸 점심으로 국밥 한 그릇을 시켰던 것인데 그러고 보니 궁금하기도 했었다. 

‘남원집 국밥’의 정체는, 그 속맛은 과연 어떤 식감과 냄새와 여운을 갖고 있는 것일까. 주방에서 국밥을 준비할 사이에 밥보다 주모가 먼저 들어와 사연 하나를 들려주었다. 

“이 국밥은 말이야, 누가 제일 즐겨 드셨나 하면… 천상병 시인이야.”

“이 세상 소풍 잘했다”란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나신 그 유명한 천상병 선생이 즐겨 드셨다고? 63세에 타계하셨으니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리셨지 않은가. 부인 문순옥 여사가 ‘귀천’이란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그 좁은 쉼터에 비주류 문화인들과 팬들이 몰려드는 게 답답하다고 찾아가는 곳이 남원집이었다. 시인은 남원집의 국밥을 좋아했다. 동백림 사건 때의 고문 후유증과 충치로 치아가 부실했던 그는 막걸리가 끼니였으며 국밥은 특식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렀다. 

남원집 주모 소미선은 천상병을 존경했고, 천상병도 남원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국밥이 먼저 나왔다. 항상 얼큰한 해장국이 제격이던 나에겐 너무 부드럽고 고소했다. 국물은 사골만 우려낸 거라 그렇다고 했는데 살짝 풀어놓은 된장도 슴슴하고 달았다.

시래기는 정말 보드라웠다. 이건 해남 배추 말린 거 아니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 주모가 얼른 주방으로 가더니 밥 한 그릇을 퍼왔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는데 “밥통 열고 처음 푼 밥이다. 아부지밥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밥을 한 술 뜨면서 (술이 덜 깬 탓인지, 홀아비 생활이 서러웠는지)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다.

 


[윤동혁]  글쓴이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국일보, MBC, SBS 등을 거쳐 강원원주시 귀래면으로 귀촌해 프리랜서 PD로 일하고 있다. 한국방송대상을 3회 수상했고, <색, 색을 먹자>라는 책을 펴내는 등 집필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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