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사람 2019.12 P.86-89 Discovery]

▲ 겨울철 보양식 홍합탕 ⓒPixabay

찬바람 부는 계절…동서양 반전의 명품 홍합요리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photo shutterstock

뜨거우면서도 시원한…

찬 바람 부는 계절이다. 이럴 때 먹는 별미의 참맛은 뜨거우면서 동시에 시원한 데 있지 않을까? 한 수저 떠 넣으면 입이 뜨겁고 그래서 몸까지 따뜻해지는데 뱃속은 시원하고 마음은 훈훈해지는 음식 말이다.

세상에 그런 음식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꽤 있다. 홍합탕이 그런 별미 중 하나다. 뜨거운 국물에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일단 물리적으로 맛있는 데다, 퇴근길에 하루를 마감하며 먹으면 쌓인 피로가 날아가고 속은 풀어지며 머리는 맑아지니 심신이 상쾌해진다.

국물이 뜨끈하면서 얼큰하고 그래서 시원하기로는 홍합짬뽕도 빼놓을 수 없다. 평범하게 먹는 한 끼 식사이기에 부담이 없는데 맛에 더해 홍합을 하나씩 건져 빼 먹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그렇기에 마음 맞는 짝과 함께 먹으면 홍합짬뽕 하나로도 넉넉하게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엔 알게 모르게 홍합을 재료로 만든 음식이 적지 않다. 양념장 맛있게 만들어 썩썩 비벼 먹는 홍합밥은 그렇지 않아도 천고마비의 계절을 지나며 물만 마셔도 살이 쪄 걱정이었던 참에 시름을 더해준다.

먹자니 과식할 것 같고 외면하자니 입안이 아우성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신선한 홍합으로 끓인 바다 향 가득한 홍합죽 한 그릇이면 임금님 보양식이라는 전복죽이 전혀 부럽지 않다.

홍합탕수육이나 비주얼 그럴듯한 홍합찜, 홍합볶음 한 접시는 술안주로도 제격이고, 고추와 각종 채소 송송 썰어 번철에 기름 두르고 부쳐 낸 홍합전이 놓이면 잔칫상이 따로 없다.

국으로 끓여도 맛있고 삶아도 좋고 지지고 볶아도 별미일뿐더러 가격도 저렴하고 만들기도 간단해 한국 음식에서 홍합이 만들어내는 요리의 조화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홍합이 제철인 계절이 됐는데 역사를 보면 한국인에게 홍합은 특별한 음식이었다.

서민의 겨울 별미? 조선 왕실의 특별 보양식!

역사상 홍합을 특별하게 먹었던 사람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 정조였다. “경들은 삼합미음(蔘蛤米飮)을 드셔보았는가?” 정조가 조정의 대신들에게 묻기도 하고 또 스스로 답을 내리기도 했다. “내가 먹어보니 정말 효과가 괜찮은 것 같소.”

조정 대신들도 뒤질세라 맞장구를 쳤다. 영의정 서명선이 말하기를 “신도 연이어 복용한 적이 있는데 효과가 적지 않았습니다.” 병조판서에게도 복용한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역시 효과가 좋았다고 대답한다.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성록>에 정조는 거의 매일 삼합미음을 먹었다고 나온다.

삼합이라고 하니 대다수 사람들이 삭힌 홍어와 돼지고기, 묵은지를 싸서 먹는 홍어삼합(三合)을 떠올리지만 정조가 매일 복용했다는 삼합은 홍어와는 거리가 멀다.

인삼 삼(蔘)자와 조개 합(蛤)자를 써서 삼합(蔘蛤)인데 여기서 조개는 붉은 조개인 홍합이다. 그러니까 삼합미음은 홍합에 인삼을 더한 죽으로 정확하게는 홍합에 소고기와 해삼, 찹쌀, 인삼을 섞어 끓인 보양식이다.

쉽게 말하자면 고급 홍합죽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눈에는 홍합죽이 특별할 것도 없지만 당시 정조는 엄청난 보양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특별히 홍합을 챙긴 데는 사연이 있다.

보양식으로 먹기도 했지만 홍합과 인삼을 넣어 끓인 삼합이 천식에 좋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담배를 엄청나게 피운 지독한 골초였다. 지금의 애연가처럼 담배가 정신건강에 좋다고 강변하며 흡연을 장려하기도 했던 임금인데 그러다 보니 기침이 엄청 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담배가 좋다고 하면서도 홍합죽 삼합을 먹으면 기침이 가라앉는다고 믿고 또 효과가 좋았다고 주변에 확인까지 하고 있으니 뒤집어보면 흡연 폐해에 그만큼 불안해했다는 소리다.

어쨌거나 정조 스스로는 홍합죽 삼합이 담배를 많이 피워 생긴 천식에 좋다고 믿었고, 영의정과 병조판서 역시 모두 삼합을 먹어봤는데 진짜 효과가 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임금님 앞이라서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선시대 상류층에서는 보양식으로 홍합을 많이들 먹었던 것 같다.

기록을 보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상에도 홍합이 잔뜩 차려졌다고 나온다. 다양한 홍합요리가 올라왔는데 먼저 해삼과 소고기, 홍합으로 끓였다는 삼합미음이 보이니 정조가 매일 보양식처럼 먹었다는 음식이니까 어머니 환갑상에도 빼놓지 않았던 것 같다.

해산물 젓갈 중에는 홍합 젓갈도 보이고 또 홍합을 볶은 홍합초(紅蛤炒), 홍합부침인 홍합전(紅蛤煎)도 있다.

지금은 흔해 빠진 게 홍합이지만 옛날엔 홍합이 만만한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혜경궁 홍씨의 환갑상뿐만 아니라 왕실 제례상에 홍합찜(紅蛤熟)을 올렸다는 기록이 보이니 옛날엔 홍합을 무척이나 귀하게 여겼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인조 때 윤문거라는 문신이 일기를 썼는데 몸이 몹시 피로해 홍합과 인삼으로 끓인 삼합탕을 먹으면 바로 나을 것 같아 홍합을 구하려 해도 찾지를 못해 먹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것을 보면 옛날엔 홍합이 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희위귀(物稀爲貴), 옛말에 사물은 드물면 귀한 법이라고 했고 귀한 음식은 약으로 쓰였으니 홍합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문헌 곳곳에는 정조가 즐겼다는 삼합미음 외에도 홍합이 들어간 음식 대부분은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일반 상식을 뛰어넘어 특별한 경우에 먹는 특별한 음식으로 취급했다.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 역시 홍합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는데 <승정원일기>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왕대비의 병환을 걱정해 영조가 수라를 들지 않자 신하들이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걱정하는 대목이 보인다.

“일반 사람들은 지극히 애통한 일을 당하면 처음에는 화열(火熱)이 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줄도 모르는데 일단 병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이니, 제왕이라고 해서 어찌 다르겠습니까. 시중의 효자 가운데는 병이 날 것을 염려하여 혹 홍합수계탕(紅蛤水鷄湯)을 먹고 나서야 슬픔으로 목숨을 잃는 일을 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들 효자라고 칭송합니다. 이는 진실로 슬픈 감정을 억제하여 효를 온전히 하는 방도입니다.”

홍합수계탕은 홍합을 넣고 끓인 닭백숙이니 슬픔에 겨워 기운을 잃을 때 원기를 회복할 정도의 보양식으로 여겼다. 그래서 명나라 때 의학서 <본초강목>에는 홍합이 허한 기운을 보충하고 정력에 도움이 되며 콩팥을 따뜻하게 하고 차가운 기운을 없애 양기를 보충한다고 했다. 또 맛이 달고 성질이 따뜻해 피부를 윤기 있고 매끄럽게 만든다고 했으니 홍합을 먹으면 속살이 예뻐진다는 속설까지 생겼다.

조선 홍합의 높은 인기

홍합은 옛날부터 몸에도 좋다고 여겼던 데다 맛이 좋아 수요가 많았다. 내륙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기에 진귀한 식품으로 여겨 옛날부터 바닷가에서 중앙의 조정에다 바치는 공물 품목에 홍합이 들어 있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의 ‘공규열전’에는 명주(明州)라는 곳에서 해마다 홍합을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물량도 많고 운반도 만만치 않아 백성들의 고충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나라 헌종 때 화주 자사로 있던 공규가 명주에서 해마다 바치는 홍합을 수도인 장안까지 운반하느라 수많은 사람이 고생을 한다며 홍합을 공물 품목에서 면제해달라고 상소를 올려 폐지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주는 지금 중국의 저장성 닝보라는 곳이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은 현재의 시안으로 오늘날에도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려도 하루 종일이 걸린다. 더욱이 닝보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은 계속 산맥을 타고 오르는 오르막길이니 당시 홍합을 수송하던 사람들의 고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조정에 바치는 홍합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연간에 당나라 공규의 예를 들어 공물로 바치는 홍합을 줄여달라고 상소를 올리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그런데 홍합은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홍합이 특히 품질이 좋았던 것 같다. 중국 문헌에 홍합을 ‘동해부인’이라고 했는데 중국에서 동해라고 하면 바로 우리나라 쪽이다. 또 조선시대 때 중국으로 사신을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기행문인 각종 연행록을 보면 중국으로 가져갔던 물품 중에 홍합이 반드시 들어 있었다.

중국 현지에서 교류하는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에도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챙겨간 홍합을 팔아 여행 경비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홍합이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홍합의 다양한 활용도 홍합찜 ⓒPixabay

인기 만점, 벨기에 홍합탕의 비밀

홍합은 서양에서도 많이 먹는다. 하지만 홍합을 보는 눈은 동서양이 확연히 달랐다. 이름에서도 시각 차이를 엿볼 수 있는데 동양에서 홍합(紅蛤)은 글자 그대로 조개 살이 붉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영어로 홍합은 머슬(Mussel)이다. 근육이라는 뜻의 머슬(Muscle)과 발음이 같고 어원마저 같다. 어원사전을 보면 두 단어 모두 라틴어 무스쿨루스(Musculus)에서 나왔는데 작은 쥐(Little Mouse)라는 뜻이다. 크기와 모양이 생쥐와 닮았기에 생긴 이름이라고 풀이하는데 그래서인지 서양에서 홍합은 썩 인기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까지 북해를 사이에 둔 나라에서는 모두 다양한 홍합요리가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벨기에 홍합요리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가 높다.

와인홍합찜부터 치즈홍합구이, 홍합크림그라탕까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홍합탕과 감자튀김인 물프리트(Moules-frites)다. 포도주값이 물값보다 싼 만큼 조리용 화이트 와인을 베이스로 작은 양파인 샬로트와 쪽파 대신 파슬리, 버터로 요리한 후 마늘로 간을 한다.

그런데 왜 벨기에 홍합탕이 유명해졌을까? 벨기에산 홍합이 특별히 더 싱싱하고 맛있다거나 아니면 벨기에 바닷가에 홍합이 풍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은 바닷가에서 가깝지도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홍합탕과 감자튀김 요리가 발달했던 데는 배경이 있다. 녹녹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벨기에 서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벨기에의 홍합과 감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옛날에는 웬만한 사람들은 먹지 않는 음식, 철저한 빈민의 음식이었다는 점이다. 옛날 유럽에서 감자는 주로 가축 사료로 쓰였던 작물이고, 전쟁 포로에게 먹였던 음식이었다.

홍합도 비슷해서 전통적으로 유럽에서는 굴을 최고로 여겼기에 굴이 로마 황제가 찾던 별미이자 귀족의 해산물이었지만 홍합은 가난한 어부의 음식, 전쟁 때 식량이 부족하면 대신 먹었던 해산물이었다.

벨기에가 홍합으로 유명해진 1차적 배경은 16세기에 건설된 윌브록운하 덕분이다. 지금의 브뤼셀에서 북해의 항구인 앤트워프를 향해 흐르는 스헬데강까지 잇는 폭 30m, 깊이 2m, 길이 28km의 그다지 길지 않은 운하다.

1436년에 처음 계획이 수립됐지만 약 100년 후인 1550년에 건설을 시작해 1561년 완공됐는데 운하 건설이 파란만장했던 것은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얽히고설킨 벨기에의 만만치 않은 역사 때문이다.

어쨌든 운하 건설로 브뤼셀에서부터 앤트워프 항구를 거쳐 멀리 북해까지 바닷길이 이어졌고, 그 덕분에 북해의 풍부한 수산물이 들어와 경제 발달과 함께 백성들이 먹고사는 형편이 나아졌다.

하지만 겨울이 문제였다. 여름에는 운하 덕분에 풍부해진 물고기로 양식을 해결했지만 해마다 겨울이 되면 서민들에게는 시련이 닥쳤다. 바다와 함께 북해로 이어지는 뱃길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값싼 생선의 공급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이때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만든 음식이 벨기에 홍합탕과 감자튀김이다. 지금 벨기에에서는 연간 6만 톤의 홍합을 소비한다고 하는데 바다가 얼어 잡히지 않는 생선 대신 북해에 널린 홍합을 따서 썰매로 얼어붙은 운하를 통해 날라와 부족한 양식 대용으로 끓여 먹었다.

동시에 겨울만 되면 평소 밥처럼 먹었던 생선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기에 평소 가축 사료로나 쓰던 감자를 생선처럼 가늘게 썰어 기름에 튀겨 먹었다, 감자튀김인 프렌치프라이가 생겨난 유래다. 이름은 프렌치프라이지만 기원이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라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벨기에의 명물 홍합탕과 감자튀김은 이렇게 육지와 바다에서 나오는 가장 싸구려 음식 두 가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반전의 명품 요리다. 그리고 그 배경엔 척박한 삶을 이겨낸 역사가 있다.

저작권자 © 한국외식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