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사람 2020.01 P.88 Food & Story]

도토리묵 ⓒKorea.net
도토리묵 ⓒKorea.net

가루로 만들어뒀다가 구황식으로 쑤어 먹었던 우리네 전통 별미 묵은 전분이 주성분으로 별다른 맛은 없지만 야들야들한 질감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가는 음식이다.

거의 대부분이 수분으로 이뤄져 웰빙과 다이어트 열풍 덕분에 재평가된 행운의 음식이기도 하다. 매끄러워 젓가락으로 집으면 뚝뚝 끊어질 것 같지만 높은 탄성력을 지녀 다른 채소와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으면 입맛을 돋워준다.

editor  최은희 수원과학대학교 글로벌한식조리과 교수, 조리외식학 박사
도토리, 메밀, 녹두, 옥수수 등의 가루를 풀처럼 되게 쑨 뒤 식혀서 굳힌 음식을 우리는 묵이라 부른다.

<명물기략(名物紀略)>에 묵의 어원에 대해 밝힌 부분을 보면, “녹두 가루를 쑤어서 얻은 것을 삭(索)이라 하는데 속간(俗間)에서는 묵(纆)이라고도 한다. 묵은 억지로 뜻을 붙인 것이다”라고 했고, <사류박해(事類博解)>에선 묵을 ‘녹두부(綠豆腐)’라고 했다. 원래 녹말(綠末)이란 말은 녹두의 전분을 뜻하지만, 지금은 모든 곡물의 전분을 녹말이라고 부른다.

입맛 돋워주는 녹두묵

녹두 전분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청포묵 가루를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녹두묵은 녹말가루에 5~6배의 물을 붓고 잘 저어서 두꺼운 냄비에 담아 불에 올린다.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으면서 풀을 쑤듯이 끓이는데 말갛게 익은 후에도 계속 저으면서 뜸을 들여야 한다. 

녹두 전분으로 쑨 청포묵을 고기, 지단, 미나리, 숙주를 섞어 소금, 참기름으로 무치거나 간장으로 새콤달콤하게 무친 탕평채는 입맛을 돋워준다. 색이 맑아 어떤 요리에나 잘 어울리며 천연 재료를 이용해 물을 들여 다양한 색깔로 즐기기도 한다. 특히 치자로 색을 들이면 황포묵이 되는데, 이는 전주비빔밥에 빠지지 않는 재료다. 

녹두묵의 효능으로는 해열·해독작용이 있고 피부 미용, 피로 회복, 체력 증진, 식욕 증진, 이뇨작용과 신장 기능 강화,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준다. 몸의 부기도 없애주고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등 다양한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강원도 토속음식 올챙이묵

올챙이묵은 옥수수가 많이 나는 강원도의 고유한 토속음식인데 모양이 올챙이 같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필자의 고향이 춘천이라 어려서 자주 먹었던 여름철 별미로 옥수수묵이라고도 하고 올챙이묵국수라고도 한다. 

만들기는 여간 어렵고 까다로운 게 아니다. 옥수수 가루로 묵을 쑤어 구멍 뚫린 네모난 나무틀에 부어 눌러 찬물에 내리면 글루텐이 없는 옥수수묵은 올챙이 모양처럼 뚝뚝 끊겨 찬물 속에 잠긴다. 짭조름하게 만든 양념간장을 얹어 열무김치와 함께 먹는 맛은 별미 중의 별미다. 전통시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새벽부터 쑤어온 올챙이묵을 맛볼 수 있는데 숟가락으로 먹어야 국수 가락처럼 매끄럽게 넘어가는 제맛을 알 수 있다.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는 도토리묵

<동의보감>에 도토리의 효능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며, 떫고 독이 없으며, 설사와 이질을 낫게 해주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몸에 살을 오르게 한다고 적혀 있다. 또 늘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이 먹으면 좋다고 했다. 성질이 따뜻하므로 속이 찬 사람이 먹으면 좋다고 쓰여 있다.

도토리묵에 각종 채소를 곁들여 비벼 먹으면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김칫국에 차게 식힌 다시마 국물을 섞은 뒤 송송 썬 김치, 오이, 김 가루, 참기름을 넣어 묵국수(묵사발)를 만들어 먹어도 별미다. 시원하게 우린 멸치 육수를 뜨끈하게 끓인 후 도토리묵, 따뜻한 밥, 달걀지단, 채 썬 김치, 김 가루를 넣어 만든 도토리묵밥은 추운 겨울에 제격인 음식이다. 

요즘은 묵잡채라 하여 말렸다가 미지근한 물에 불려 볶아 먹으면 쫄깃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도토리에 함유된 야콘산이라는 성분은 인체 내부의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을 흡수해 배출하는 작용을 하며, 꾸준히 섭취하면 지방 흡수를 억제하고 배설을 촉진해 비만 치료에 도움이 된다.

<옹희잡지>에 나오는 도토리묵 쑤는 법을 보면, “흉년에 산속의 유민들이 도토리를 가루 내어 맑게 걸러 청포처럼 묵을 쑤는데 자색(紫色)을 띠고 맛도 담담하지만 배고픔을 달랠 수 있다”고 했고, <산림경제>에선 “도토리 껍데기를 벗겨 쪄 먹으면 흉년에도 굶주리지 않는다”고 했다.

소박하면서도 구수한 메밀묵

박목월 시인은 시 ‘적막한 식욕’에서 메밀묵을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이라 읊으면서 걸걸한 막걸리에 메밀묵이 먹고 싶다고 했다.

겨울철 밤참으로 즐겨 먹던 메밀묵엔 루틴이라는 성분이 있어 혈압을 내리고 혈관 벽을 튼튼하게 해 고혈압, 동맥경화, 혈당 조절, 콜레스테롤 감소 등에 큰 효과가 있다. 섬유질 함량도 높아 몸속 노폐물을 제거하며, 변비도 예방해 비만 환자에게 좋다. 

<시의전서>의 메밀묵 만드는 법을 보면, “녹말을 가는 체로 밭쳐 물에 가라앉힌 후 물만 따라 버리고 쑤되 되면 딱딱하고 불이 세면 눌어붙으므로 뭉근한 불로 쑨다. 소금, 기름, 깨소금, 고춧가루를 넣고 무쳐 담을 때 김을 부수어 뿌린다”고 했다.

메밀묵무침은 김치랑 찰떡궁합으로 폭 익은 김장김치에 설탕, 통깨, 참기름으로 무친 뒤 간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대파, 참기름에 무친 메밀묵을 섞어 먹으면 구수한 우리네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소박한 음식이 만들어진다.

이 밖에도 봄철에 별미인 올방개묵, 충청도 향토음식 중 하나인 밤묵, 해초의 한 종류인 우뭇가사리를 물에 넣고 풀을 쑤듯 뭉근히 삶아 그 물을 틀에 붓고 식혀 묵처럼 굳힌 우무묵 등이 묵 종류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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