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의 소문난 남도음식 명가, 한정식집 ‘수림정’

[음식과사람 2020. 02 P.68-72 Real Interview]

 “대를 이어 화순의 100년 식당 되는 게 소망이에요~”

여러 가지 음식을 두루 맛보는 즐거운 식도락에 남도음식만 한 게 없다. 기와를 올린 오래된 한옥에서 밥상 가득 차려진 한정식을 받을라치면 세도가 부럽지 않은 뿌듯함은 덤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 먹거리 문화도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옛것을 고집하는 남도음식 명가들이 있어 다행이다. 전라도 음식도 다 옛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전통의 남도음식을 23년간 지켜온 전남 화순의 ‘수림정’을 찾았다.

editor 조윤서   photo 김성남

대박집 비결 1

옛날식 기와집에서 신식 한옥까지 한정식으로 달려온 외길
“건강한 제철 농수산물로 계절마다 다른 요리를 손님상에 올린답니다~”

전남 화순군청 건너편에 있는 한정식집 수림정은 화순 사람들에겐 이미 유명한 곳이다. 상견례나 팔순잔치처럼 약간의 격식을 갖춰 기념해야 하는 날엔 더없이 적격인 게,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은 기본이고 조용하고 넓은 안마당과 기와를 올린 한옥의 멋스러움, 4명부터 80명 정원의 크기가 다른 방들이 여럿 있어서다.

화순 토박이인 박정덕(56) 대표가 수림정을 운영하게 된 건 대부분의 운명이 그러하듯 우연히 찾아왔다. “시집 와서 스물아홉 되던 해 처음 식당을 차렸어요. 매운탕이랑 가물치회, 백숙을 파는 가든 식당이었는데 무서워서 가물치를 못 잡고 회 뜨다 매일 열 손가락이 베이고 그랬죠. 촌에선 안 되겠다 싶어서 읍으로 나와 차린 게 ‘크리스탈레스토랑’이에요. 이름도 유별나고 메뉴도 안 어울렸어요. 돈가스랑 목포 먹갈치조림을 팔았거든요. 어느 날 손님으로 오신 어르신이 군청 뒤에 마땅한 곳이 있는데 거기서 식당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가보니 아주 오래된 기와집이었지만 마음에 들더라고요. 메뉴는 그 자리에서 결정됐어요. 기와집에 어울리는 메뉴는 한정식밖에 없었거든요(웃음). 제 나이 서른둘이었고, 벌써 23년 전 일이네요.”

‘고을에서 가장 으뜸가는 식당이 되라’는 의미로 수림정이라 이름 짓고 1997년 한정식집으로 새 출발을 했다. 신선한 제철 식재료로 계절마다 찬을 달리하여 1만 원, 2만 원, 3만 원 하는 한정식 상차림을 선보였다.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큰 욕심 내지 않고 정직하게 차려 냈더니 나날이 손님이 늘었다. 지자체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날식 기와집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증축·이전한 게 10년 전. 집 세 채를 허물고 6개월이 걸려 부지 700평에 테이블 55개, 크고 작은 룸 18개를 갖춘 튼튼하고 오래갈 한정식집이 완성됐다.

수림정의 메뉴는 기본 한정식, 특정식, 수림정식으로 단출한 편. 하지만 가격대에 따라 가짓수를 달리해 홍어삼합, 보리굴비구이, 병어찜, 잡채, 서대무침, 문어숙회, 광어숙성회, 참조기무조림, 육회, 매생이탕, 가리비찜, 파래굴무침, 각종 전류, 연근깨무침, 석박지 등 입맛 돋우는 한식 요리들이 그야말로 한 상 가득 나온다. 이곳이 달리 한정식집이 아니라 반찬을 놓자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단다. 흔히 남도음식은 젓갈을 많이 사용해 짤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딱 적당한 그 맛이다.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옛날식으로 밥상을 차려내도 수요와 공급이 안 맞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박집 비결 2

전국 유일 굴비 덕장 보유, 대량 생산하고 가격 안정성 확보
“신안 천일염으로 섶장해서 겨울바람에 오래 말리니 맛있을 수밖에요~”

“대중음식이면서 손님들 입맛 사로잡는 현실적인 밥상이 수림정의 상차림이에요. 음식은 맛이 있어야 약이 되는 법이잖아요. 제철 원재료의 맛과 질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조리법이 핵심이에요. 제철 맞은 가리비는 그저 삶기만 해도 맛있고 겨울에 먹는 매생이탕은 그 자체로 몸보신이 돼요. 자연스러운 맛을 내기 위해 인공 감미료는 거의 안 쓰고 간장, 고추장, 된장은 직접 담근 걸 써요. 짜지 않고 시원해서 인기인 석박지는 1년에 2톤가량 담그죠.”

채소는 농장에서 직접 키운 신선한 것들을 먼저 쓰고 모자라면 광주, 화순의 공판장에서 충당한다. 남도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생선 등 수산물은 일주일에 한 번 물때를 맞춰서 여수, 목포, 영광 등지의 수산물시장에 직접 가서 구매해온다.

빨간 고무장갑에 고무장화 신고 다니며 꼼꼼하게 원물을 비교해서 사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수림정의 모든 상차림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보리굴비구이는 지금의 수림정을 있게 한 효자 메뉴다. 점심 특선으로 3인 이상 주문 시 단돈 1만 원에 제공하는 보리굴비 정식을 먹으러 손님들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다.

예약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인원수만으로 보리굴비 정식을 주문할 정도. 오븐에 두 번 구운 보리굴비 외에 20가지쯤의 요리들이 상에 차려진다. 곁들여진 돼지감자물에 밥을 말아서 노르스름하게 구운 굴비 한 점과 먹는 맛이 유별나다.

먹기 좋게 잘 손질돼 나오는 굴비는 꾸들꾸들 쫀득한 식감이 좋고 짜지 않으며 바람에 오랫동안 말린 생선의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그니처 메뉴인 마른 보리굴비 정식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단돈 1만 원에 팔 수 있는 건 근처에 자체적으로 보리굴비 덕장을 보유하고 있어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겨울 한 철 나는 굴비를 여름에 먹으려고 겨우내 바람에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한 후에 보리 항아리에 파묻어두었다.

보리는 성질이 차서 한여름에도 손을 넣으면 시원할 정도라 그렇게 보관하면 비린내가 사라지고 곰팡이도 안 슬어 좋은 반면, 너무 바짝 말라버려 쌀뜨물에 담갔다 쪄 먹어야 했다. 저장 방식이 다양해진 요즘엔 굴비를 굳이 보리쌀에 넣어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됐고, 바람에 오랫동안 말린 조기를 통상적으로 보리굴비라 칭한다.

“포장이나 택배 주문도 많아서 연간 소비되는 물량이 10만 마리가 넘어요. 전국에서 보리굴비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가게도, 개인 덕장을 보유한 가게도 여기밖엔 없을 거예요. 저희는 가을쯤 씨알이 굵은 싱싱한 수조기(부세) 1년 치를 한꺼번에 구매해서 작업해요. 3년 보관해서 간수를 충분히 뺀 신안 천일염으로 10~15시간 정도 섶장을 한 다음 크기별로 선별해서 건조대에 널어요. 40~50일간 차가운 겨울바람에 골고루 말린 보리굴비는 걷어서 냉동 보관을 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있어요. 손님상엔 주로 오븐에 노릇노릇 구워서 올리죠.”

이처럼 맛있게 준비된 굴비는 맛있는 밥과 먹어야 더 조화롭다. 한정식집에선 맛있는 밥이 관건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압력솥에서 갓 지은 밥 500인분을 직접 공기에 퍼 담는 건 늘 박 대표의 몫. 밥은 주인장이 퍼서 손님께 대접해야 지극한 정성이 통한다고 믿어서다. 

“3분이면 한 솥 다 퍼요. 이젠 내공이 붙어서 다 된 밥에 주걱을 넣는 순간 누가 한 밥인지 다 알 정도가 됐죠. 따끈따끈한 밥공기들은 바퀴 달린 대형 보온밥통에 넣었다가 방마다 밀고 다니면서 상에 올려요. 저희 집은 밥맛이 좋기로도 유명한데 찹쌀이 안 들어가도 밥이 찰지고 윤기가 돌고 늘 먹어도 햅쌀 같아요. 1년간 저농약으로 계약농사를 짓고 쌀은 한 달에 한 번씩 정미해서 찧어오거든요.”

대박집 비결 3

손님들 의견 경청하고 적극 수렴하는 활짝 열린 외식경영
“화순 관광객들에겐 조식 뷔페, 무등산 등반객들에겐 ‘내 도시락을 부탁해’ 제공해요” 

수림정 입구로 들어오면 진열대 위에 겹겹이 쌓인 진공 포장 보리굴비가 시선을 끈다. 포장해달라는 손님들의 요구로 오븐에 구워 쿠킹호일에 싸주던 것을 2007년경 상품화한 것이다.

굴비를 마치 간고등어처럼 진공 포장을 해서 판매하는 이런 방식은 박 대표가 처음 시도한 것인데 처음부터 반응이 너무 좋았다고. 대형 오븐에서 40분 이상 두 번 구운 후 식혀서 포장하기에 집에선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만 돌려서 먹으면 된다. 전국 어디나 주문 즉시 구워서 배송하니까 언제나 신선한 보리굴비를 맛볼 수 있다.

“평소에 손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눠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손님들이 만족해야 수림정도 오래갈 수 있는 거잖아요. 진공 포장 방식도 그렇지만 저희 집 보리굴비 맛은 손님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단골손님들은 먹으면서 그러시거든요. 박 사장 올해는 굴비가 딱딱해, 너무 많이 말렸어, 좀 짠 거 아니야? 등등. 그분들 말씀도 일리가 있었고 의견을 수렴해서 매년 굴비 말리는 방식에 변화를 주다 보니 오늘의 굴비 맛이 나왔어요.”

손님들 요구를 적극 수용해 말과 행동으로 소통하고 보여주는 박 대표는 작년 8월 새로운 시도를 했다. 80석 대형 홀에서 매일 아침 한정식 조식 뷔페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가격도 저렴해서 7000원에 밥, 국, 20여 가지의 반찬과 과일 등 맛깔스러운 아침 식사를 먹을 수 있다. 시간은 오전 7시부터 9시 30분까지.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개방한다.

“경기가 안 좋아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거나 큰 수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에요. 제 고향 화순에 뭐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화순군청에 매달 장학금을 지원하는 건 소극적인 방식이었고, 관광객들에게 화순이 인상적으로 기억될 만한 일을 고민했는데 그게 조식 뷔페였어요. 흔히 지방 소도시를 여행할 때면 아침은 주로 해장국이나 북엇국 같은 걸 먹게 되잖아요. 화순을 찾아온 관광객들만큼은 우리 농수산물로 만든 안전하고 맛있는 한식을 드시길 바라요. 나중에 좋은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관광객보다 지역주민들이 더 많네요. 아까도 야구부원들 운동 끝나고 온다고 예약전화 왔어요(웃음).”

수림정의 맛있는 한식은 무등산으로 배달도 된다.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고 지역 특산품으로 만든 도시락 구매를 장려하는 국립공원의 친환경 도시락 배달 서비스에 수림정도 동참하고 있는 것. 지난해 9월부터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 ‘내 도시락을 부탁해’에 주문하면 수림한정식, 수림맛굴비 메뉴를 무등산 등반길에 탐방지원센터 등 지정된 장소에서 수령할 수 있다.

무등산을 오르는 전국의 등반객들이 수림정의 한식을 맛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원래 군청이나 세무서, 경찰서 등 관공서 근처엔 주민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 많은 법.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외지 손님들도 많이 찾아오지만 단골손님들 대부분은 화순에 사는 지역주민들이다. 한식 밥집이라서 손님층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가족 단위 손님들도 많다. 

“한자리에서 20년 넘게 장사했더니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오픈 무렵부터 일주일에 4~5번씩 식사하러 오시는 기업 회장님도 계시고, 돌잔치 했던 꼬마 손님이 다 커서 찾아오기도 하고. 학생회에 기부했던 식사상품권을 가져와 즐겁게 먹고 떠드는 고등학생들도 있고요. 경상도에 사시는 어떤 할머니는 어느 날 보자기 두른 바구니에 뭘 잔뜩 갖고 절 찾아오셨어요. TV에서 봤다며 홍시를 한아름 주시더라고요.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는데 KBS ‘2TV 생생정보’에 저희 수림정이 방영된 걸 보신 모양이에요. 제가 수림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특별한 인연들이라 늘 감사할 따름이에요.”

대박집 비결 4

정직한 식재료, 가족 같은 직원들, 행복한 일터의 하모니
“전통을 고수하는 대물림 향토음식점으로 오랫동안 남고 싶어요~” 

박 대표는 외식업을 하면서 몇 가지 철칙을 세웠다. 시장은 반드시 직접 볼 것이며, 음식은 식재료를 속이지 않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 직원은 보배니 항상 소중히 대할 것 등이다. 

“직원을 홀대하면 식당의 생명력도 단축되는 것 아니겠어요? 수림정이 이만큼이나 된 건 직원들 공이 커요.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직원이 열 명 됐을 때 너무 좋았는데, 지금은 남편과 아들 둘 포함해서 정직원만 열다섯 명이에요. 크리스탈레스토랑 시절부터 20년 이상 함께 일한 직원이 네 명, 10년 이상 된 직원도 그 정도 되고요.”

건축업을 하던 남편 최주승(60) 씨는 2010년 증축 당시 구석구석 못질이며 손님상 제작이며 손 안 간 데가 없을 정도로 수림정의 뼈대를 튼튼히 세워주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작은아들 최홍준(28) 씨는 2018년부터,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큰아들 최문준(30) 씨는 작년부터 박 대표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함께하고 있다.

“저는 이 업이 정말 재미있어요. 전라도 말로 ‘겁나 좋아부러요.’ 여기 있으면 밖에 안 나가도 즐겁거든요. 이제 23년 됐지만 수림정이 대를 이어 100년 식당이 되는 게 소원이에요. 그러려면 아들의 아들 대까지 가야 하겠죠. 애들한테도 누누이 얘기해요. 수림정은 아빠가 지은 집이고 엄마의 목숨과도 같은 곳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소원은 자꾸 말해야 이뤄진다면서요? 그러면 100년 식당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졸음을 참고 새벽 장을 보러 가도, 직원들에게 밉지 않은 잔소리를 하면서도, 마음 쓰이는 손님에게 보리굴비 한 마리를 덥석 쥐어주면서도 행복한 건 지금 박 대표가 서 있는 자리야말로 오래전부터 그렇게 되기로 예정돼 있던 천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77년 후엔 그와 꼭 닮은 누군가가 그를 추억하며 같은 말을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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