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사람> 1월호

[음식과 사람 2016-1 p.88 Ingredient]

 

우리 속담에 ‘밥 위에 떡’이라는 말이 있다. 흡족하게 가졌는데도 더 주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밥보다 떡을 한층 더 맛있는 음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떡은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거치게 되는 중요한 통과의례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떡은 대표적인 별식이자 우리 민족과 함께 지내온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떡은 예로부터 나눔의 상징이었다. 떡을 하는 집에서는 이웃집과 친척집에 나눠주기 위해 으레 많은 양의 떡을 장만했다. “남의 떡에 설 쇤다”는 말과 함께 “얻은 떡이 두레반이다”라는 속담은 떡을 나누어 먹던 풍속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제사상에도 떡은 빠지지 않는데, 그 때문에 집안이 불화하고 항상 사나운 일만 계속되는 집을 ‘떡 해먹을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귀신들을 위해 떡을 올리는 고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나라가 뒤숭숭할 때에도 ‘떡 해먹을 세상’이라고 했다. 무당이 굿을 할 때에도 떡이 사용되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은 팥고물을 얹은 팥시루떡으로 시루째 상에 올려놓은 뒤 시루 위에는 큰 삼지창을 꽂았다. 제물로 올라갔던 떡은 아무리 먹어도 체하지 않는 복떡으로 불리며 이웃과 친척들과 함께 나누었다. 속담에는 밥을 소재로 한 것보다 떡을 소재로 한 것이 훨씬 더 많다. 밥은 늘 먹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떡은 별식으로 그와 연결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농경시대와 함께 시작된 떡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유교적 정치윤리가 확립되면서 의례식의 발달로 큰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잔칫날이나 기념일 등에 음식을 높이 쌓는 게 유행하면서 켜가 얇고 끈기가 많은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겉모양을 꾸미기 위해 겉면에 묻히는 가루인 고물도 여러 가지로 만들고 색깔이나 모양을 내기 위해 떡 위에 올리는 웃기떡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쌀가루에 여러 가지 곡식 가루를 섞거나 과일, 꽃, 야생초와 약재 등도 넣었고, 지방마다 고장에서 나는 재료로 특색 있는 떡을 만들었다. 떡을 만드는 재료가 많아지고 떡의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맛이 월등히 좋아진 것이다. 떡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크고 작은 행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으며 신분과 관계없이 두루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 떡국 한 그릇에 담긴 염원

설 명절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떡국을 빼놓을 수 없다.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분명치 않지만 옛 문헌들은 떡국을 세찬상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한복을 입는 사람이 드물어지고 세배의 순서도 희미해졌지만 떡국만큼은 새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요즘도 떡국 한 그릇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여기는데, 새해의 떡국은 나이를 더 먹는 떡이라는 뜻에서 ‘첨세병(添歲餠)’이라 불리기도 한다.

떡국에는 우리 민족의 원대한 소망이 녹아 있다. 길쭉한 가래떡은 무병장수를 의미하고, 가래떡을 엽전처럼 둥글게 썬 것은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은 것이다. 단명과 배고픔을 숙명으로 알았던 조상들의 한과 염원이 떡국 한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이다. 떡국에 들어가는 가래떡의 하얀 색깔은 지난해 안 좋았던 일을 깨끗하게 잊고 새롭게 새해를 시작하자는 뜻이 함축돼 있다. 백의민족이라 불릴 만큼 흰색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과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기도 하다.

쌀이 귀하던 옛날에는 명절이나 잔치처럼 의미 있는 날에나 떡을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 먹기 힘든 고기와 떡을 넣은 떡국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민족의 잔치인 명절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떡국은 흰떡을 엽전 모양으로 잘게 썬 다음 간장국에 섞어서 꿩고기, 쇠고기, 고춧가루 등을 넣어 조리했다. 그러다 꿩고기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닭고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 떡국 / 사진 = flickr

물론 둥근 모양의 떡국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성 지역에서는 조롱박 모양의 ‘조랭이떡국’을 해 먹는다. 개성에서는 가래떡보다 얇은 떡을 만든 뒤 대나무를 이용해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든다. 개성 사람들은 개성 보쌈김치, 개성 만두와 함께 조랭이떡국을 개성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꼽는다. 조랭이떡국은 귀신을 물리치는 의미가 있다고 전해진다. 조롱박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이것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랭이떡이 누에고치 모양과 같다고 해서 한 해의 길운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았다.

아울러 고려 이전부터 장사에 능했던 개성 사람들은 조랭이떡의 모양이 엽전 꾸러미와 닮아 재물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설날 아침에 조랭이떡국을 먹었다고도 한다.

한쪽에서는 조랭이떡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목을 조르는 형상이라고도 말한다.<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서는 “가래떡을 어슷어슷 길게 써는 것은 전국적이다.

하지만 개성만큼은 조선 개국 초에 고려의 신심(臣心)으로 조선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뜻에서 떡을 비비고 끝을 틀어 경단 모양으로 잘라내어 생떡국처럼 끓여 먹는다”고 적고 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 박해를 받은 개성 사람들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떡국 한 그릇도 편히 먹을 수 없던 시절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흰옷과 흰 떡국조차 금지하면서 강제로 신정이라 불리는 양력설을 쇠도록 했다. 이런 강제와 핍박 속에서도 지켜낸 음식이 바로 떡국이다.

떡국 한 그릇에는 우리 선조들의 아픔과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 탄생의 축복을 비는 떡

아기가 태어나서 스무하루가 되는 삼칠일(三七日)이 되면 대문에 달아놓았던 금줄을 걷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했다. 이때부터 산실의 모든 금기를 풀고 아이에게도 제대로 옷을 갖추어 입혔다. 이때 떡으로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순백색의 백설기를 준비하는데, 이는 아이와 산모를 속세와 구별하여 산신(産神)의 보호 아래 둔다는 신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때의 백설기는 집안에 모인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끼리만 나누어 먹고 밖으로는 내보내지 않았다.

출생한 지 백일이 되는 백일 떡에는 그때까지 아이가 잘 자라준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잘 자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일 떡은 백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명을 사서 백수까지 산다는 속설이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이웃과 나누었다. 떡을 받은 집에서는 빈 그릇을 돌려보내지 않고 무명실이나 쌀을 담아 보내는 미풍양속이 있는데 이는 아기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백일 떡으로는 백설기, 붉은찰수수경단, 오색송편을 장만한다. 백설기에는 아이가 희고 순진무구하게 자라라는 기원이 담겨 있고, 붉은찰수수경단에는 액을 미리 막아준다는 의미로 귀신이 피하는 붉은색을 썼다. 그래서 아이가 열 살이 되는 생일까지 붉은찰수수경단을 만들어 먹었다.

▲ 백설기 / 사진 = flickr

오색송편은 아주 작고 예쁘게 만드는데 오행(五行), 오덕(五德), 오미(五味)와 마찬가지로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라는 의미가 있다. 이때 송편을 두 종류로 만드는데 속을 꽉 차게 만드는 것은 학문으로 꽉 차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고, 속을 비게 만드는 것은 마음을 넓게 가지고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첫돌에는 아이의 장수복록을 기원하며 화려한 의복을 만들어 입히고 돌상을 잘 차린다. 이때의 떡으로는 인절미, 오색송편, 수수팥경단의 세 종류 외에도 백설기가 오른다. 백설기에는 신성함과 정결함이, 인절미에는 끈기 있는 사람이 되라는 기원이, 오색송편엔 우주만물과의 조화, 수수경단에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액막이로 떡을 해먹는 풍속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재래식 화장실은 넓고 깊어 어린아이가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럴 때는 ‘똥떡’을 만들어 먹었다. 변소에 떨어졌던 아이는 결국 죽게 된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의 액운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름은 아름답지 못하지만, 변소 귀신을 위해 쌀가루로 만든 쌀떡이었다. 대개 송편만큼씩 동그랗게 100개 정도를 만들어 변을 당한 아이가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나누어 주었다. 이때 아이는 “똥떡, 똥떡”이라고 외치며 이웃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어야만 비로소 그 액운을 면할 수 있게 된다고 여겼다.

아이가 자라 독립할 때가 되면 성년례를 치렀는데, 성년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갈무리할 수 있는 책임과 의무를 일깨워주도록 했다. 성년례에는 각종 떡과 약식을 포함한 많은 음식으로 성인이 된 것을 축하했다.

 

▶ 통과의례에서 만나는 떡

통과의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혼례이다. 혼례는 이전까지 남남으로 살던 남녀가 부부가 되기 위해 올리는 의식으로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이다. 혼례에서도 떡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혼례 의식 중에 함 들이기가 있는데,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함을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함이 들어올 시간에 맞추어 북쪽으로 향한 곳에 돗자리를 깐 다음 상을 놓는다. 그리고 상 위에 붉은색 보를 덮은 뒤 떡시루를 얹어 기다리다가 함이 들어오면 시루 위에 얹어 놓고 북향재배(北向再拜)를 한 뒤 함을 연다. 바로 이때 사용되는 떡이 봉치떡이다.

봉치떡은 찹쌀 석 되, 팥 한 되로 찹쌀시루떡을 두 켜만 안치되, 위쪽 중앙에 밤 한 개와 대추 일곱 개를 방사형으로 올린다. 봉치떡을 찹쌀로 하는 것은 부부의 금실이 찰떡처럼 화목하게 되라는 뜻이며, 떡을 두 켜로 올리는 것은 부부 한 쌍을 의미하는 것이다. 붉은팥 고물은 화를 피하는 벽화(僻禍)를, 밤 한 개는 딸을, 대추 일곱 개는 아들 칠 형제를 상징한다. 이는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신부집에서 신랑집에 보내는 이바지 음식으로도 떡을 많이 했는데, 이때는 대개 인절미와 절편으로 만들어 떡 바구니인 동구리에 푸짐하게 담아 보냈다.

▲ 인절미 / 사진 = flickr

혼례에 절대 올리지 않는 떡도 있다. 반달 모양으로 떡 속에 공기가 가득 차도록 하여 일명 ‘바람떡’이라 불리는 개피떡은 결혼식 잔칫상에는 절대 올리지 않는다. 결혼식 날 개피떡을 만들어 먹게 되면 신랑 · 신부가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예순한 살이 되는 생일을 회갑이라 하여 자손들이 큰 연회를 베풀었다. 회갑연 때는 큰상을 차리는데 음식을 높이 고이므로 ‘고배상(高排床)’ 또는 바라보는 상이라 하여 ‘망상(望床)’이라고도 부른다. 회갑상에는 음식을 30~60㎝ 정도까지 원통형으로 고이고 색을 맞춰 두세 줄로 배열한다. 떡은 갖은 편이라 하여 백편, 꿀편, 승검초편을 만드는데, 만들어진 편은 직사각형으로 크게 썰어 네모진 편틀에 차곡차곡 높이 괸 후 화전이나 주악, 단자 등 웃기를 얹어 아름답게 장식한다. 인절미 등도 층층이 높이 괴어 주악, 부꾸미, 단자 등의 웃기를 얹는다. 회갑연에 썼던 떡은 잔치가 끝난 후 서로 나누어 먹는다.

떡은 행사와 절기에 따라 무한 변신이 가능한 음식이고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요즘은 다양한 떡 케이크가 생크림 케이크 못지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전통 떡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대소사와 함께하고 있다. 변화무쌍함을 고명처럼 얹은 떡은 존재 자체만으로 매력적이다. 이제 떡을 구시대 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떡의 전성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글 : 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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