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0.02 P.84-87 Discovery]

제비집, 샥스핀, 해파리냉채… 중국 산해진미의 비밀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photo shutterstock, gettyimages

맛있는 음식을 산해진미라 한다. 하지만 맛있다고 모두 산해진미는 아니다. 쉽게 맛볼 수 없는 요리여야 한다. 어원인 산진해착(山珍海錯)의 의미가 그렇다. 다시 말해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산해진미가 아니다.

청나라 최고 미식가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가 서태후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해진미를 먹으며 지냈다. 19세기 말 동양 최대 북양함대 유지에 필요한 군비를 빼돌려 황실 여름별장인 이화원을 지으며 흥청망청 놀고먹는 데 쓴 사실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한 끼에 백은 100냥을 썼다는데 당시 평민의 1년 치 수입보다 많은 돈이었다. 이런 엄청난 돈을 쓰면서 도대체 무엇을 먹었을까?  

서태후는 무엇을 먹었을까?

서태후의 한 끼 식사에는 보통 100가지 요리가 차려졌다고 한다. 아무리 대식가여도 한 번에 100가지 요리를 다 먹을 순 없으니 대부분 3~4가지 요리만 먹었다. 젓가락도 대지 않은 음식들은 모두 내관과 궁녀의 몫이었으니 엉뚱한 사람들이 음식 호사를 누렸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주로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특별히 좋아한 음식은 오리고기였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베이징오리구이는 청나라 황실에서 특별히 발전시킨 요리로 보통의 경우 살코기는 먹지 않고 바삭하게 잘 구운 껍질만 밀전병에 싸서 먹는다.

이런 베이징오리고기 중에서도 서태후가 각별히 좋아한 것은 오리 혀였다. 서태후를 모셨던 궁녀 유덕령이 남긴 <어향표묘록>엔 오리 혀를 고기와 함께 쪄서 요리하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아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았다고 나온다.

얼핏 들으면 겨우 오리고기, 그것도 오리 혀 같은 엽기적이지만 대단할 것 없는 요리로 입맛을 만족시키려고 그 많은 돈을 썼을까 싶지만 내막을 알면 조금 다르다. 서태후 식탁에 차려지는 요리는 그렇게 만만한 음식들이 아니었다.

1861년 음력 10월 10일은 서태후의 서른한 살 생일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날 아침상에 모두 24가지 요리가 차려졌다. 후식 네 가지를 뺀 20가지 요리 중 무려 8가지가 오리구이와 오리탕, 오리 콩팥 등 각종 오리고기였다.

오리고기를 유별나게 좋아했다는 사실 외엔 특별히 화려하다거나 소문만큼 사치스러운 요리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서태후를 보고 음식에 흥청망청 돈을 쏟아 부었던 미식가라고 비난할까 싶지만 내용을 알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요리를 만드는 재료가 유별났다. 후식과 국수를 제외한 요리 중 일곱 가지를 귀한 제비집을 소스로 만들어 조리한 것이다. 서태후의 생일상이 특별했던 이유다.

아무 맛이 없어도 최고의 맛, 제비집

중국 음식 중에서 최고급 요리로 꼽는 제비집 요리는 금사연(金絲燕)이라는 바다제비의 집을 재료로 만든다. 제비집은 동남아 등지의 해안 절벽에 만들어져 채취하기가 어렵고 그 양도 적었기 때문에 주로 베트남 등지에서 조공으로 진상했던 품목이다.

역대 청나라 황제가 좋아했기에 중국과 교역을 원했던 네덜란드에선 건륭 60년인 1795년, 제비집 100근을 구해 보내며 거래를 추진했을 정도다. 이렇게 귀한 제비집을 별도 요리도 아닌 오리고기를 삶고 찌는 데 육수로, 소스로 사용했으니 서태후의 생일음식 준비에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갔으며 그 생일상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제비집은 사실 별도 요리가 아닌 보조 재료다. 제비집 수프도 내용을 보면 제비집만을 재료로 끓이는 수프가 아니다. 제비집 육수를 베이스로 상어지느러미인 샥스핀이나 해삼, 죽순, 전복, 버섯 등 다른 재료를 넣고 끓인 음식이다.     

귀하다는 바다제비집을 왜 이런 식으로 요리하는 것일까? 최고급 재료는 그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제비집은 굳이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해야만 한다. 이유는 바다제비집은 아무 맛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맛이 없으니 단독으로는 요리할 수 없다.

그럼에도 특별한 맛이 없는 제비집이 어떻게 최고의 식품이 됐고 어째서 청 황제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재료가 됐을까? 이유를 청나라 학자이자 미식가였던 원매(袁枚)가 쓴 <수원식단>에서 찾을 수 있다.  

“제비집은 마치 평범한 사람(庸陋之人)과 같아서 결코 그 자체만으로는 맛이 없고 반드시 다른 재료에 의지해야만 제맛을 낸다.”

그러니 그 가치가 아무리 높아도 단독으로는 먹을 수 없다. 지미무미(至味無味)의 맛이라는 것인데 특별한 맛이 없으나 다른 재료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 재료의 맛을 최고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 맛도 없는 맛, 그래서 한편으로는 최고의 맛, 지미의 맛이라는 제비집 요리가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중국 최고 요리라는 소리를 듣게 됐을까? 먼 옛날부터 산해진미로 알려졌을 것 같지만 제비집 요리가 정작 유명해진 것은 청나라 이후부터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년 남짓이다.

물론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음식의 역사에선 그다지 긴 역사는 아니다. 명나라 때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바다제비집 요리가 최고의 중국 요리가 된 것은 청나라 황제와 귀족들이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건륭황제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비집 수프 한 그릇으로 공복을 달래며 하루를 시작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청나라 황제들은 건륭제 이래로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溥儀)에 이르기까지 첫 식사를 제비집 수프나 제비집 죽을 비롯해 제비집 요리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청나라 상류층은 왜 이렇게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닌 제비집 요리에 빠졌을까? 이전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제비집 요리가 청나라에서 최고급 요리로 둔갑한 배경을 정확히 알 순 없다.

뒤늦게 제비집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족 출신이었기에 먼 바다인 동남아, 그중에서도 흔치 않았던 음식 재료인 제비집의 희소가치에 빠졌던 것일 수도 있다.

식도락이 만든 별미, 샥스핀

상어 지느러미인 샥스핀도 마찬가지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팔진미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상식을 넘어서는 환상에서 비롯된 부분이 적지 않다.

흔히 샥스핀을 중국 황제들이 먹었다는 고급 요리라고 말하지만 역대 중국 황제 중샥스핀 요리를 제대로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멀리 기원전의 진시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당, 송, 원, 명의 황제 중엔 상어 지느러미를 먹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쯤 전인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 황제 몇몇의 식탁에 샥스핀이 올라왔을 뿐이다.

기록을 보면 1861년, 다섯 살의 나이에 황제가 된 청나라 동치제의 섣달그믐 만찬에 샥스핀 요리가 보인다. 모두 열여섯 가지 요리를 차렸는데 대부분 바다제비집 소스로 만든 요리였고, 일부가 샥스핀을 넣고 끓인 닭고기 요리였다.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음식 사치가 심했던 서태후의 수라상에도 샥스핀 요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어 지느러미와 함께 볶은 돼지고기 편육 정도가 있을 뿐이다. 역대 중국 황제들은 왜 그 유명한 샥스핀 요리를 먹지 않았을까?

상어 지느러미가 고급 요리가 된 역사가 늦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샥스핀이 값비싼 고급 요리 재료지만 옛날엔 다리 넷 달린 것 중에서는 식탁 빼고 다 먹는다는 중국에서조차도 거의 먹지 못하는 음식 재료 취급을 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상어 지느러미는 베트남에서 명나라에 보낸 조공 품목이었지만 황제가 거들떠보지도 않아 대신 주방 요리사에게 하사품으로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 중국의 콜럼버스라는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로 떠날 때 양식이 떨어져 동남아 해안마을에 들러 원주민이 먹다 버린 상어 지느러미를 요리해 먹은 것이 식용의 시작이라는데 둘 다 문헌적 근거는 없다.

샥스핀의 역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확인된 기록으로는 16세기 말 명나라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나오는 내용이 비교적 오래된 것이다.

상어 지느러미는 맛이 탁월해 남방에서 진귀하게 여긴다고 나오는데, 뒤집어 해석하면 수도인 베이징을 비롯해 북방 사람들은 잘 먹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명나라 때만 해도 광둥지방을 비롯한 남부에서 주로 먹었을 뿐 황제가 사는 북방의 베이징까지 퍼진 요리는 아니었다.

중국에서 샥스핀 요리가 발달한 것은 18세기 후반 청나라 무렵이다. 미식가로 유명한 원매의 요리책 <수원식단>에 샥스핀 요리법이 보이고 <본초강목>을 보충한 의학서로 <수원식단>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본초강목습유>에 샥스핀이 연회 음식에 사용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리하자면 16세기 말엔 동남아와 광둥 등 남부에서 주로 먹었던 상어 지느러미가 18세기 후반 이후 청나라 부유층의 요리로 퍼지기 시작해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청나라 황제의 식탁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국빈 만찬 요리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유해 생물에서 미식으로, 해파리냉채

우리에게 익숙한 해파리냉채도 비슷하다. 중국에서도 상하이와 저장성 등 동남부 해안지역 도시에선 설날인 새해 춘절 음식상에 해파리 요리가 빠지지 않는다.

해파리냉채는 새콤달콤한 겨자 소스와 오돌오돌 씹히는 해파리의 식감이 식욕을 돋워주는 데다 각종 채소를 곁들여 다양한 색깔이 시각을 자극한다. 먹기도 좋지만 보기에도 좋아 전채 요리는 물론 손님상이나 잔칫상 요리로도 인기가 높다. 

질 좋은 해파리는 요리해놓으면 색이 노랗고 광택이 나기에 마치 황금처럼 보이기 때문에 새해 해파리를 먹으며 부자 되기를 소원하는 풍습이 있다. 중국 북방에서 잉어, 남방에서 조기를 먹는 것과 비슷한 이유인데 어쨌든 옛날 중국인들은 어떻게 해파리 먹을 생각을 다 했을까?

해파리는 피부에 조금만 스쳐도 살갗이 바로 부풀어 오를 정도로 독성이 강한 바다생물이다. 물론 우리가 먹는 해파리는 식용이어서 아무런 해가 되지 않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200여 종의 해파리 중에서 식용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10종 이내라니까 식품과 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못했던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먹을 수 있는 해파리를 찾아낸 옛사람들의 노력이 대단하다. 

해파리 식용에 관한 기록은 3세기 후반 진나라 때 장화의 <박물지>에 보인다. 그러니 최소한 1700년 전부터 해파리를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처음엔 머나먼 이국 바닷가 마을에서 먹는 특이한 해산물로 여겼을 뿐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광둥, 푸젠 등 바다와 가까운 지방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로 여겼다. 그러다 연회용 고급 요리로 발달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 무렵부터다. 

심지어 이 무렵부터는 해파리가 단순히 맛있는 요리를 넘어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등장했다. 청나라 의학서엔 해파리가 몸속 기운을 잘 통하게 만들어주고 뭉친 피를 풀어주며, 숙취와 해장에도 좋은 음식 재료라고 기록돼 있다. <귀연록>이라는 청나라 의학서에선 묘약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옛날 말을 다 믿을 것은 못 되지만 해파리야말로 저칼로리 식품이고 성질이 차가운 음식이나 잘만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풀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청나라 의학서 표현대로라면 해파리만 한 보양식품이 따로 없다. 

어쨌거나 그동안엔 별것 다 먹는다는 중국에서조차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해파리인데 왜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해파리가 갑자기 고급 요리로 각광받게 된 것일까? 문헌의 근거를 토대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해파리와 상어 지느러미, 바다제비집은 모두 중국 남부와 동남아 바닷가의 특산물이다.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모든 음식 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옛날엔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식재료들이 많았으니 해파리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니 대륙을 차지한 만주 출신의 청나라 상류층에겐 자신들에게 흔했던 곰 발바닥 같은 전통적 산해진미보다 먼 곳 바다에서 나는 희귀한 식재료였기에 더 특별한 진미로 여겼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더해 물론 상류층의 식도락이라는 단순한 호기심과 유행을 명품 요리로 발전시킨 요리사의 솜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 후기 문헌에 이 무렵 중국 배들이 해파리를 잡으러 우리 바다를 수시로 침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해파리가 곧 돈이 됐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까지만 해도 외면당했던 바다제비집과 상어 지느러미가 청나라 이후 최고 요리로 각광받게 된 배경을 해파리가 고급 요리가 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전성기를 구가했던 청나라 후반, 고도의 사치와 식도락이 만들어낸 미식들이다.

윤덕노 

청보리미디어 대표 겸 음식문화평론가로 음식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며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다. 매일경제신문사 베이징특파원과 사회부장, 부국장을 지냈으며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음식이 상식이다> 등 음식문화 관련 책을 다수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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