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2.03. P80-83 Discovery]

차가운 육수에 담긴 '메밀국수' ⓒ한국외식신문
차가운 육수에 담긴 '메밀국수' ⓒ한국외식신문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예전 사람들은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고 했다. 면발이 기다란 것처럼 수명도 길어진다는 것이다. 얼핏 들어도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속설에 근거해 국수 면발을 끊지 않고 먹는다. 국수 먹으면 장수한다는 믿음,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퍼져 있다. 동양엔 왜 이런 속설이 퍼졌을까?

​이유가 있다. 옛날엔 진짜 국수를 먹고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말장난이나 근거 없는 미신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속설엔 옛 시대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음식문화사, 식품 발달사 등이 녹아 있다. 국수와 면발 그리고 인간의 수명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천 년 전에 퍼진 ‘장수면’의 속설

​국수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의 원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서역을 통해 이런 음식이 중국에 전해져 발달했고 동쪽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 퍼졌다. 그런 만큼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의 진원지는 일단 중국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중국인의 뇌리 속엔 ‘국수=장수면’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대표적 흔적이 생일 국수다. 우리가 생일에 미역국을 먹고 서양에서 케이크를 자르는 것처럼 중국에선 생일에 국수를 먹는다. 태어난 날을 기념해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먹는 음식이다. 그래서 생일 국수를 특별히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선 언제부터 생일에 국수를 먹었으며, 언제부터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었을까? 속설이 생긴 것은 대략 1000년쯤 전인 송나라 무렵, 그리고 생일에 국수를 먹기 시작한 역사는 당나라 이전 무렵일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국수가 장수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시기를 짐작케 해주는 문헌이 있다. 12세기 송나라 사람 주익이 쓴 <의각료잡기>다. 여기에 당나라 사람들은 생일에 다양한 종류의 밀가루 음식을 먹는데 세상에선 이를 보고 장수를 빌며 먹는 국수, 즉 장명면(長命麵)이라 부른다고 했다. 장명(長命), 즉 수명을 늘려주는 국수라는 것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마경영의 <라진자>라는 문헌에도 유명한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 쓴 ‘진사 장관에게 보낸다’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여기에도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장관은 관직이 아닌 사람 이름이다. 유우석의 조카뻘 되는 인물로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지만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고 진사가 되어 멀리 벼슬길을 떠나게 되자 송별회에 참석해 지은 시라고 한다.

​이 시에 주목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손님으로 초대받아 상석에 앉았다. 젓가락 들어 국수 먹으며 기린만큼 오래 살기를 축원했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기린은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 전설 속 동물로 수명은 약 1000년 정도다. 밀가루 음식, 즉 국수를 먹으며 기린처럼 천년을 살라고 덕담을 한 것이다. 그까짓 국수 하나 먹으며 천년만년 살라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국수와 관련된 12세기 문헌 <의각료잡기>와 <라진자>의 내용을 정리하면 두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먼저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송나라 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장명면, 즉 장수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이는 것이 송나라 무렵이다.

​또 하나, 당나라 때부터 사람들은 생일날과 잔칫날에 국수를 먹었다. 실례로 양귀비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당 현종 이용기(685~762년) 역시 생일에 국수를 먹었다.

​현종이 황제가 되기 전 임치왕이었을 때 당시 황후 위씨의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당했다. 신변에 위험이 닥쳤음을 직감한 이융기가 실권자였던 위황후를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우선 아버지를 황제인 예종으로 앉혔다가 곧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황후가 된 부인 왕씨의 친정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황제가 된 현종은 후궁인 혜비 무씨를 총애해 폐비 논쟁이 일어났다.

​무혜비가 황후 자리를 탐내 조강지처인 왕씨를 쫓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왕 황후가 폐비 될 위기에 몰리자 현종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폐하는 어찌 저희 친정아버지가 옷까지 팔아 폐하의 생일 국수를 끓인 것을 잊었단 말입니까?”라며 옛정을 상기시켰다. <신당서> ‘후비열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당나라 때 국수는 상류층의 생일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수는 당나라 황제의 생일 음식

​다시 원래의 국수 이야기로 돌아와 8~9세기 당나라 사람들은 왜 생일에 국수를 먹으며 오래 살기를 소원했을까? 식품의 역사, 구체적으로 국수 발달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은 국수의 개념이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면발이 긴 밀가루 음식을 국수라고 하지만 옛사람들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었던 음식은 정확히 말하면 탕병이다.

​떡 병(餠)에 끓일 탕(湯)자를 쓰니 쌀로 만든 떡국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쌀이 됐건 밀가루가 됐건 가루를 뭉친 음식은 모두 병(餠)이다. 그러니 분식 문화권에서 탕병은 국수 면발이 아직 길어지기 전, 초기 형태의 국수 내지는 수제비 같은 음식을 말한다.

​그러면 생일에 왜 이런 음식을 먹었을까? 보통 생일엔 평소와 달리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 옛날 집안 어른이나 벼슬이 높은 고관대작, 부자의 생일 음식은 더욱 특별했다. 더군다나 당나라 시인 유우석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진사의 잔칫상이나 당 현종 이용기처럼 왕의 생일상은 더더욱 각별했다.

​탕병이 이런 잔칫날에 먹는 각별한 음식이었는데, 이유는 당시엔 밀이 귀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조선시대엔 밀을 많이 재배하지 않았기에 밀가루가 귀했고, 그래서 밀가루를 진짜 가루라는 뜻에서 진가루로 불렀는데 당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메소포타미아가 원산지인 밀이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때 이후다. 하지만 밀은 8세기 이전인 당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널리 퍼지지 못했다. 이 무렵 중국의 주식은 북방의 경우 기장과 조, 귀리 등 잡곡이 중심이었다.

​당나라 때는 황하 유역이 정치와 경제의 중심으로 인구 역시 이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황하 유역인 섬서, 하남, 하북, 산서, 산동 지역에선 주로 기장과 조 등을 재배했고 밀은 대중적인 곡식이 아니었다. 당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밀은 고급 작물이긴 했지만 주요 식량이 아니었기에 세금 징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상류층이 먹는 특수 작물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상류층은 기장, 일반인은 조를 먹었고 서민은 수수와 피(稗)를 먹었는데 진짜 하층민은 그나마 피죽도 제대로 못 먹고 굶기를 밥 먹듯 했을 것이다. “피죽도 못 먹었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반면 밀은 최고 상류층의 곡식이었는데 그것도 지금처럼 밀가루 음식이 아니라 보리밥처럼 밀을 그대로 찐 밀밥을 먹었다.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드는 과정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벼는 껍질 벗기기가 쉽지만 밀은 껍질이 여섯 겹이기에 도정 과정이 훨씬 복잡하다. 이 때문에 제분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밀가루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한나라 무렵이다. 그렇기에 한나라 때는 밀가루 음식이 황제의 음식, 하늘에 제례 지낼 때나 쓰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3세기 무렵 문헌에 처음 보이는 만두가 바로 제례용 음식이었다. 그래서 한나라엔 황제의 음식 제례용 음식인 분식, 즉 탕병을 다루는 벼슬인 탕관(湯官)을 별도로 두었을 정도였다.

​송나라 이후 평민도 먹는 대중 음식으로

​한나라 이후 700~800년이 지난 당나라 초기만 해도 밀가루 음식이 귀하긴 마찬가지였다. 제례용 음식, 황제 수랏상에만 오르는 요리는 아니어도 잔칫날이나 생일처럼 특별한 날엔 귀인들이나 밀가루 음식인 탕병을 먹었다.

​그러니 평소 좁쌀이나 수수, 심지어 잡초인 피밥 먹는 사람들이 특별한 날에 상류층 사람들이 밀가루 음식인 국수, 탕병을 먹는 것을 보고 “나도 저런 국수 먹으면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원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더군다나 당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을 보통 40세로 추정하는데 국수를 먹는 상류층은 이때도 환갑을 넘게 살았으니 국수 먹으며 기린처럼 오래 살기를 축원하는 풍속이 생겨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나라 이후부터 국수 먹으며 오래 살기를 소원한다는 말이 문헌에 자주 등장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국수를 장명면, 장수면이라는 별칭으로 부른 것은 11세기 이후 송나라 무렵이다. 당나라 때는 국수가 아직 상류층 음식이었던 반면 송나라에서 국수는 평민도 먹는 대중 음식이 됐다. 중국에서 국수와 만두를 비롯한 분식이 널리 퍼진 시기가 바로 송나라 때다. 송나라 때 국수가 널리 퍼진 이유는 농업과 경제,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송나라는 정치적·군사적으로 북방의 요와 금나라에 밀리고 핍박을 받았지만 경제적·문화적으로는 획기적 발전을 이뤘다. 음식문화만 해도 지금 중국인의 주식인 쌀밥과 국수, 만두를 비롯해 중국 음식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가 송나라 때다.

​밀 재배가 늘면서 송나라엔 다양한 분식이 등장했다. 당나라에선 밀가루 음식이라도 국수 종류인 탕병은 별식이었고 상류층에선 주로 서역 음식인 호떡이 유행했다. 하지만 송나라에선 만두가 소 없는 찐빵 만터우부터 포자만두, 교자만두, 훈툰 등 종류가 다양해졌다. 국수도 널리 퍼지면서 면발이 길어졌고 종류도 다양해져 알려진 국수 종류만 10가지가 넘었다.

​대중도 국수를 먹기 시작하면서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이때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얼핏 터무니없는 속설 같지만 그 속엔 이렇게 국수의 발달 과정이 반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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