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혁의 음식이야기

[음식과사람 2024.02. P.78 Food  Essay]

찌개 ⓒPixabay
찌개 ⓒPixabay

editor 윤동혁

“고향에 아이(아니) 간 지 오래됐지.”

옌볜(延邊) 할머니가 밥을 봉긋 솟아오르게 담으며 약간 슬프게 말했다. 새해 첫날 새벽에 밥을 먹으러 비닐 휘장을 밀치며 들어서는 손님이나, 그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할머니들이나 어쩔 수 없이 처량한 느낌을 목도리처럼 감고 있다. 전날 밤 고급 중식당에서 망년회를 가졌던 나도 고개를 움츠리고 가난한 냄새 속으로 진입했다.

서울 나들이를 할 때마다 인사동 뒷골목의 싸구려 모텔에서 밤을 보낸 뒤 송해 선생의 얼굴이 그려진 원조 우거지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지라 어색할 일은 없다.

그러나 새해 첫날이 아닌가. 자리에 앉으면 할머니가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쌀밥을 먼저 식탁에 올려주고 깍두기 한 접시가 반찬으로 나오면 바로 우거짓국 대령이다.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다.

아니다. 다를 바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두부 한 조각이 국 속에 잠겨 있었다. 설날 특선이렷다.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주문했다.

“달걀프라이 주세요.”

두 개 지져서 2000원이니까 우거짓국 3000원 합하면 5000원. 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지출은 불가능하다. 다른 메뉴가 없다. 또 충분히 배가 부르니까 뭘 더 시킬 필요도 없다.

“오늘 몇 시에 나오셨어요?”

“우린 일 년 열두 달 똑같아요. 새벽 3시 반에 나와서 바닥 청소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밀고 들어와.”

신정도, 음력설도, 추석도 반납하고 일하는 게 단순한 수입의 증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옌볜 할머니들의 억척스러움 속에는 일말의 모성애가 엿보였다.

잠시 손님이 뜸할 때 뜨거운 우거지 국물을 뱃속에 집어넣는 손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시선에서 분명히 감지되는, 자기가 누군가의 헛헛한 뱃속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있다는 시골 어머니의 모성이 느껴졌다.

“아이고, 이쁜이 할배 고마워요.”

그쪽을 바라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행주로 자기 식탁을 깨끗이 훔치고 있었다. 그런데 남들이 먹고 나간 식탁까지도 손질하고 있었으며, 그분은 늘상 그렇게 하시는 모양이다. 할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공기밥 추가요!” 할머니는 비닐봉지에다 밥을 2인분쯤 더 담아준다. “저 양반, 개를 몇 마리 키우거든.”

이쯤에서 처량한 느낌은 싹 걷히고 만다. 이곳에 와서 새해 첫날 식사를 한 게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니까 5000원 한 장이 나왔다. 나는 ‘지공거사(지하철 공짜 손님)’ 교통카드를 잊고 왔으므로 표를 사기 위해 천 원짜리로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천 원짜리 넉 장과 백 원 동전 열 개를 쥐어주며 말했다. 내가 자동판매기 커피를 뽑아 먹으려는 줄 아신 모양이다.

“자판기에 천 원짜리 넣지 마. 잔돈이 안 나올 때가 있거든. 동전 두 개 넣으라고.”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200원을 넣고 밀크커피를 뽑았다. 달달한 자판기 커피가 빵빵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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