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사람> 6월호

[음식과 사람 2016-6 P.48 Food Essay]

 

여태 그 위세가 당당했지만 이젠 프로듀서에게도 황혼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그래도 식당 운영하는 분들은 여전히 자신의 영업장이 3대 지상파 방송에 소개되길 원한다. 하물며 20년, 30년 전에는 어땠으랴. 프로듀서의 위상도 지금보다 수십 배 더 높았다. 나는 그 막강한 파워를 활용해 횡포를 일삼았는데 그중 하나는 특정 음식을 못 먹게 하는 것이었다.

요즘도 3박 4일 해외여행 길에 볶음고추장이며 깻잎 싸가지고 가시는 분 많다. 30년 전에는 어떠했겠는가. 출장 일수가 길어지면 스태프들의 고향 음식 갈증은 극에 달한다. 출장 현장이 고국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욕망이 커지게 마련이다.

어쩌다 한국 식당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간절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그때 나의 행동은 벌 받아 마땅하지만 ‘안 된다’였다. ‘곧 집에 돌아가면 허구한 날 드실 텐데 참으시라. 그리고 이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먹기 어려운 현지 음식 드시라’는 것이 나의 깊은 뜻이었다.

현지 음식은 현지의 역사이며 문화이다. 우리는 외국 사람이 한국 와서 청국장을 먹으며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하면서 외국 특히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아프리카, 심지어는 중국에서까지 ‘지저분하다’, ‘냄새 난다’며 현지 음식을 낯 뜨겁게 폄하하고 외면하지 않는가.

그것이 나의 ‘한식 금지령’에 대한 사상적(?) 배경이었지만, 나와 함께 외국 출장을 갔던 스태프들은 그때의 불합리하고도 쓰라린 추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 사진 = Pixabay

얼마 전 중국의 쿤밍을 여행한 적이 있다. 장예모 감독이 소수민족 다 모아서 차마고도의 애절한 사연을 춤과 노래로 엮어놓아 유명해진 그곳에서 나는 은(銀)과 동(銅)을 촬영했다. 그리고 윈난의 중국 음식 탐구에 여념이 없었는데 어쩌다 사업상 얽혀서 (내키지 않았지만)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물론 많은 양의 술과 함께) 먹게 되었다.

삼겹살구이가 대세였고 된장국, 김치찌개, 해물전… 등이 서울 종로3가 뒷골목이나 매한가지였다. 돌판이 먼저 불기운을 받았다. 그런데… 음, 이 돌판은 예사롭지 않았다. 개업한 지 5개월째, 서른세 살의 젊은 사장에게 물었다.

“이 돌판은 혹시 한국에서?”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주인 차일광 씨는 격투기 선수 같은 결연한 자세로 “무겁지만 한국에서 가져온 곱돌입니다”라고 말했다.

아, 전라북도 장수에서 여기까지 왔구나. 모든 돌들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데 한국에서 거슬러오는 돌도 있구나. 고기가 얹어지고 또 뭔가 올라앉는데 그것은 콩나물이었다. 나물 상태의 콩나물이 구석에 소복이 자리 잡고 김치도 단단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외국에서 콩나물을 만나면 눈물이 나려 한다. 사할린에서는 콩나물과 고사리를 함께 먹으며 목이 메었다. 백두산 하늘 아래 첫 동네인 도두촌에서는 집집마다 검은 천 씌운 시루에서 콩나물이 자라는 걸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수단의 카르툼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 나를 엄습한 감회 따위는 비교할 바 아니었다. 온 지구 땅을 다 뒤져봐도 콩나물 키워 먹는 민족은 오로지 단 하나, 조선 사람들뿐이다. 그 콩나물과 함께, 물론 김치와 함께 먹는 삼겹살구이는 유별났다.

그런데 격투기 선수를 연상시키는 젊은 사장 차일광 씨는 감동의 한 장면을 더 선보였다. 가위를 들고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비계를 촘촘히 썰었다. 고기가 다 익어도 비계는 덜 익는 그 온도 차를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editor 윤동혁 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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