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의 실내 분위기, 감미로워야

창문성 / 나희덕

저 집은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저 집은 감미로운 불빛을 가졌군

저 집은 우울한 내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지

저 집은 저녁 다섯 시에 가장 아름다워

그녀는 집의 표정을 잘 읽어낸다

창문성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있다는 듯

집마다 눈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장민숙, '산책', 캔버스에 유채, 2011년 作
장민숙, '산책', 캔버스에 유채, 2011년 作

시는 전문이 아니다. 부분을 옮겼다. 전문은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년)에 나온다.

한동안 그 시를 나, 까맣게 잊고서 살았다. 그러다가 최근 시인이 펴낸 산문집 '예술의 주름들'(마음산책, 2021년)에서 우연히 「창문성」과 마주쳤다. 마주침이 또 있었다.

나희덕의 빛나는 시와 서양 화가들의 명화가 절묘한 랑데부로 돋보이는 첫 산문집 '그녀에게'(예경, 2015년)에도 그 시가 오롯이 보인다. 그러니 이로써 세 번째 마주침인 셈이다.

이번엔 전과 좀 느낌이 달랐다. 꽤 큰 소득이고 선물이랄까. 그 선물은 책속의 문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장민숙 화가의 '산책' 한 점을 구입해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두었다. 화면 가득 크고 작은 집들이 그려진 반구상 풍경화였다. 서정적 분위기와 따뜻한 색감, 자유로운 터치 등으로 편안한 온기를 전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림 속의 집들은 저마다 표정을 지니고 있어서, 눈처럼 보이는 창문과 입처럼 보이는 보이는 문을 통해 무슨 말인가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집에 앉아 있어도 저녁 산책에서 돌아오는 사람의 마음이 되곤 했다. 이렇게 '산책'이라는 그림을 산책한 끝에 「창문성」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나희덕, '예술의 주름들', 258쪽 참조).

네이버 검색을 해봤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서양화가 장민숙(1967~ )의 이력이 보였다. 또한 2006년부터 대구와 서울 강남에서 해마다 개인전과 초대전에 참여한 바 있다. 최근 뉴스를 살피니, 대구 대백프라자에서 15일~20일 까지 초대전이 열린다니 여친과 그곳에 가보고픈 마음이 흰 구름처럼 굴뚝 같아진다.

본론은 이렇다. 나희덕의 시는 장민숙 화가의 그림(2011년 作)을 안방에서 산책하듯 오래오래 감상하면서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러니까 2011~2014년 사이에 어느 지면에 발표(?)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론에 앞서 장민숙 화가에 대한 나희덕의 시선을 살펴보자. 다음이 그것이다.

장민숙의 회화 작업은 2006년 첫 개인전부터 최근 전시에 이르기까지 ‘산책’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해왔다. ‘산책’ ‘플라뇌르Flaneur’는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일 뿐 아니라 작가가 풍경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위치와 관점, 태도 등을 대변한다.

‘플라뇌르’는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정작 그의 그림에는 산책자나 행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산책자의 시선은 풍경 밖에, 그리고 캔버스 밖에 무심히 존재한다.

산책자가 감정이입을 자제한 덕분에 누구나 그 풍경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도록 시선의 길을 열어준다. 창문 너머로 집의 내부를 엿보거나 상상해볼 수는 있지만, 실내의 인테리어를 보여주는 그림이 없는 걸 보면 작가는 오히려 집이 지닌 비밀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듯하다. (중략) 산책은 자기만의 집, 또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단독자의 내면 탐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필요로 한다(같은 책, 262~263쪽 참조).

지난 주말이었다. 2박 3일로 서울 여행을 다녀왔다. 숙소를 조계사 건너편 나인트리 호텔로 정한 까닭에 나는 인사동 골목을 낮이나 밤이고 쏘다녔다. 그러면서 인사동<仁寺洞>을 자꾸만 친구에게 인싸(insider)동으로 말하곤 했다. 아웃사이더로서 삶이 아닌 한번쯤은 주인공이 되고픈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이렇다. 외식업 경영주라면 무시로 소비자 입장에서 가게[假家]의 창문을 살펴야 한다는 것. 이를 강조하고 싶다. “저 집은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 저 집은 감미로운 불빛을 가졌군 / 저 집은 우울한 내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 / 저 집은 저녁 다섯 시에 가장 아름다워”를 가져다가 내 가게의 창문과 문의 관계 등을 점검하자. 자세히 볼 일이다.

아무래도 “저 집은 감미로운 불빛”을 하고 있다면, 손님이 벌컥 출입문을 열 것이다. 하지만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식당은 선뜻 입장하기가 망설여질 터. 따라서 우리 식당은 손님의 시선으로 “저녁 다섯 시에 가장 아름다”운 곳인지, 매일 표정을 밖에서 안으로 살펴 찾아볼 일이다. 인싸! 외식업 경영주로 장차 우뚝 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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