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업 창업, 부부가 중심이 돼야

황조가<黃鳥家> / 유리왕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롭구나 이 내 몸은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갈 수 있나

이중섭, '부부', 종이에 유채, 20세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부부', 종이에 유채, 20세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시는 바야흐로 1977년,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1학년) 무렵에 알았다. 그때는 여름방학을 앞둔 시간이었다. 국어 선생님께 처음 시를 배웠으리라. 그로부터 강산은 쏜살같이 40여 차례 이상 바뀌고 지났다. 다시 시를 읽는데 흥<興>과 한<恨>이 교차한다. 마주친다.

이 시를 지은이는 고구려 ‘유리왕’이라고 한다. 유리왕은 동명왕의 아들이다. 동명왕이 누구던가. 바로 고구려를 창업한 왕 고주몽이다. 그렇다. 고주몽은 2006년 MBC 역사드라마 (주몽)의 주인공(송일국 역)인데, 우리가 실은 그렇듯 어쩌면 기억할 테다.

아무튼 유리왕의 「황조가」의 원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편편황조<翩翩黃鳥>

자웅상의<雌雄相依>

염아지독<念我之獨>

수기여귀<誰其與歸>

황조<黃鳥>는 참새목 꾀꼬리를 가리킨다. 자웅<雌雄>은 성별의 구분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이성<異性>을 의미한다. 결정타는 생각을 뜻하는 한자 ‘염<念>’ 자에 있다.

따라서 시의 화자인 유리왕은 지금(今) 자기 마음(心)이 심란함의 고독(獨으로 치닫고 있음에 문득 주목한다. 같이 손잡고 돌아갈(與歸) 그 사람(其)을 누구(誰)로 정해야 할지 갈팡질팡 선택 장애를 겪는다.

유리왕에게 아내인 왕비(宋氏)는 이미 죽고 없었다. 왕비 대신에 첩으로 들인 두 여자(禾姬, 稚姬)가 아내의 자리를 탐하여 매일같이 치열하게 서로 다툴 뿐이었다.

이럴 경우, 왕비가 살았다고 한다면 무시하고 왕비의 손을 잡고 궁으로 돌아가면 그뿐인데, 누구의 편을 쉽게 들어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왕이란 입장이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 시는 이미 죽고 없는 아내(왕비 송씨)를 못 잊어서, 몹시 그리워하고 있음이다.

시와 어울리는 그림 한 점을 나는 최근에 보았다.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남긴 '부부'(1953년 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에서 입을 맞추고 포옹하는 두 마리의 새는 어쩌면 황조<黃鳥> 같기도 하고, 자웅이 서로 애틋하게 의지하는 원만함의 부부 생활을 이상적으로 연출한 그림으로 표정을 짓고 있는 듯이 하염없이 보인다.

유리왕이 죽은 왕비 송씨가 그립고 그리워서 시를 남겼다고 한다면 이중섭은 아내 이남덕이 그립고 그리워서 그려낸 것일지도 혹 모른다. 이남덕은 조선 여자가 아니다. 일본인으로 야마모토 마사코(山木方子)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이중섭과 절절한 사랑으로 일본에서 배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서 1945년 5월에 조선식 혼례를 올린 바 있다. 이때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지어준 한국식 이름이 바로 ‘이남덕’인 것이다.

그와 관련, 이유리 작가의 '화가의 마지막 그림'(서해문집, 2016년)에는 좋은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신혼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전쟁의 참화가 그들 곁으로 바짝 다가온 것이다.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자, 당시 한반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듯 이중섭 부부도 피난길에 올랐다. 그동안 태어난 두 아들과 조카 영진이 함께였다.

이중섭은 그리다 만 작품 한 점을 겨우 들고서 후퇴하는 국군 후생용 배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쫓기듯 내려왔다. 그들은 곧 마구간 같은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갔다. 막내아이의 기저귀 한 장 챙겨서 내려오지 못했을 만큼 완벽한 빈손이었다. 피난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중략) 피난민 조사를 받던 이중섭은 아내가 일본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신분을 의심받았고, 이남덕도 수용소 내에서 핍박을 받았다.

이런 문제로 피난생활 중에도 계속 뜨내기로 살아야 했는데, 그러는 1년 6개월 사이에 부산과 제주도, 다시 부산을 거치면서 이남덕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고 두 아이는 영양실조까지 걸렸다. (중략) 1952년 7월,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생활하던 남덕이 제3차 귀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잠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같은 책, 19쪽 참조)

앞의 글에서 ‘잠시’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후로 이중섭은 이남덕과 다시는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온 가족이 다시 함께 모여 사는 바람은 그저 꿈에서나 가능하고 그림으로만 남았기 때문이다.

머잖아 화가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 '사랑을 그린 사람 -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의 국내 번역이 시중에 나오길 나는 지금 기다리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마이니치신문 오누키 도모코(大貫智子·46) 기자가 5년에 걸쳐 심층 취재 한 끝에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외식업 창업의 성공?

시와 그림처럼 ‘부부’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작은 가게는 인건비를 남 주고서는 도무지 성공할 수가 없다.

미래는 앞으로 그런 시대가 자명하다. 게다가 음식장사는 "그 누구와 함께" 창업하고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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