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 작가
심상훈 작가

“화로에 술 데워 조금씩 잔에 따라 마시면, 냉면과 신 김치가 차례로 나왔다네<爐中煖酒淺斟杯, 冷麪酸菹次第開>”

임득명, '설리대적', 18세기, 종이에 담채, 삼성출판박물관
임득명, '설리대적', 18세기, 종이에 담채, 삼성출판박물관

나는 신 김치를 좋아한다. 여전히 사랑한다. ‘신 김치’를 일러서 조선의 양반들은 ‘산저<酸菹>’라고 점잖게 표현했던가.

조선 후기 때, 이조 · 예조 · 형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바 있는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의 글에도 그게 보인다. 아마도 한시는 죽은 아내가 그립고 그리워서, 한겨울에 냉면을 먹으면서 서재에서 진솔하게 써내려간 것 같다. 그러매 글은 도망시(悼亡詩)에 해당한다.

윤정현의 서재는 19세기 조선에서도 꽤 유명했다. 서재의 이름이 무언가. 윤정현은 ‘삼연재(三硏齋)’라고 지었다. 이유가 있다.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가 누구던가. 헌종(憲宗)이다. 헌종과 인연이 남달랐다. 이에 대해, 고문헌학자 박철상은 《서재에 살다》(문학동네, 2014년)에서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서재 이름을 삼연(三硏)으로 지은 것은 잊지 못하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같은 책, 278쪽 참조)

1872년 여름이었다.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윤정현은 중국 송나라 문인 소동파가 그랬던 것처럼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을 ‘청량관<淸凉館>’이라고 쓰고 걸어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죽기 2년 전의 일이다. 소동파는 일찍이 선비가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먼 길을 여행중인 나그네가 서늘한 여관(淸凉館)에 들어가 옷을 벗고 씻는 것에 비유했는데, 이 말을 좇아 윤정현은 남은 생애를 살고자 한 것이다. 욕심일랑 하나씩 비우기 시작한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윤정현은 청량관에 기거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집안 조카벌 되는 윤태승이 찾아오자 벼루 세 개(三硏)를 꺼내 보여주면서 자신의 서재를 삼연재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윤태승이 받아든 벼루는 헌종 임금의 어필이 새겨진 벼루였는데, 모두 옛날 벼루였다. 벼루를 본 윤태승은 윤정현이 이 벼루들을 무척 좋아한 나머지 서재를 삼연재라 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같은 책, 279~280쪽 참조)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憲宗, 1827~1849)은 생애가 너무 짧았다. 치세 기간(1834~1849)을 살피자면, 어린 나이(8살)에 조선의 왕이 되어야 했고 우리 나이로 스물 셋, 한창 피가 끓는 기운찬 청년 초입에 이르러서 죽었으니 당시의 황망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만약에 헌종이 좀더 길게 살았다고 한다면 19세기 조선 후기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많이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헌종이 죽자마자 생전에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벼루들이 시중에 흘러나왔던 것이다. 이를 알아본 윤정현은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했던 것이다. 벼루를 보면서 헌종이 살아 있을 때 곁을 지키던 자신을 추억했을 테다. 이는 생전에 자신을 아껴주던 헌종을 잊지 않고자 세 개의 벼루에다 서재의 이름을 가져다가 붙인 것이다.

초상화 전문 궁중화가 이한철이 그린 (윤정현 초상)을 우연히 보았다. 다음이 그것이다.

김은호, '침계상서초상', 20세기, 종이에 유채, 간송미술관
김은호, '침계상서초상', 20세기, 종이에 유채, 간송미술관

생긴 것 그대로, 아주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조선 후기 초상화의 특징을 감안하여 보자니 윤정현의 80세 때 언저리 모습을 그린 듯하다. 왼쪽 하단에 희원선생 필(希園先生 筆)이 먼저 보인다. 다음은 침계상서초상<梣溪尙書肖像>이란 글자가 나온다. 다음이 이 그림의 저작권자를 밝힌 것인데 후학<後學>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엎드려 절(拜)하고 임모<臨摹>하여 기록<錄>했다, 라는 내용이 적힌 글이다. 어쨌든 이 그림은 조선 화가 이한철이 그린 것을 가지고 후학인 이당 김은호 화가가 충실히 베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니 초상화로서 가치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사설이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나는 윤정현의 시에서 외식 아이템을 무릇 배우고자 한다.

▲ 냉면은 꼭 여름철에만 먹는 음식인가?

아니다. 한겨울에도 소비자가 찾고 먹는다. 다시 윤정현의 시를 살피자.

노중난주천짐배<爐中煖酒淺斟杯>

냉면산저차제개<冷麪酸菹次第開>

화로구이 식당이 한때 외식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 점에 착안하자. 조그마한 가게에 바 형태의 화로를 기다랗게 가로로 집어넣자. 화로에서 지글지글 고기를 누가 구워야 할까. 당연히 창업주나 종업원의 몫이다. 손님은 바 의자에서 구경한다. 손님은 혼자 앉을 수도 있고 친구와 혹은 애인과 나란히 앉을 수 있을 테다. 홀은 없다. 오로지 바(bAR)만 실내에 들어서면 보일 뿐이다. 다른 메뉴는 필요없다. 오로지 고기와 냉면, 신 김치만 준비되면 오케이다.

▲ 화로에 구운 고기와 후식 냉면, 신 김치

예약 식당제로 운영을 하자. 손님이 예약하면 바 의자에다 예약자지정석을 가져다 놓자. 그런 다음 고기를 손질하고, 후식으로 나갈 냉면을 점검한다. 손님이 온다. 조리를 시작한다. 이런 수순으로 식당을 운영하면 될 테다. 가격은 1인당 11,000원~18,000원 사이로 결정하자.

▲ 상호는 ‘삼연재’, 혹은 ‘청량관’

식당 간판의 상호는 아주 중요하다. 딱 보는 순간 필이 와야 한다. 윤정현의 삼연재는 벼루가 세 개라는 뜻이지만, 식당에서 삼연은 세 번째 연애<三戀>를 의미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추억이 있습니다. 두 번째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식당은 손님에게 세 번째 연애를 꿈꾸는 공간이 되고 싶습니다.”

뭐, 이런 문구가 홍보마케팅에 어울릴 테다. ‘삼연재’라는 상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청량관’은 어떠한가. “우리 식당은 퇴직자를 환영합니다. 환영에만 그치지 않고 할인 혜택도 듬뿍 드립니다. 혼자 오셔도 됩니다. 설리적(雪裏炙 - 눈꽃빙수에 찍어 먹는 고기)과 냉면이 당신의 품격을 높일 것입니다.”

나의 최종 결론이다. 내가 잘 가는 냉면집이 있다. 수원 융건릉 맛집 청학동칡냉면집이 단골이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화로에 술 데워 조금씩 잔에 따라 마시면, 냉면과 신 김치가 차례”대로 제공되는 음식 서비스가 없다는 점이다. 맛은 기본이다. 다음은 낭만적인 분위기, 이게 우리 음식장사 업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설리적에 냉면, 신김치를 세트로 먹을 수 있는 바 형태의 음식장사, 그래서 시중엔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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