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함민복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마구 흔들어 마시는

서민의 술

막걸리

도상봉, '동해풍경', 캔버스에 유채, 21세기, 국립현대미술관
도상봉, '동해풍경', 캔버스에 유채, 20세기, 국립현대미술관

일요일 오후. 하릴없이 냉장고를 뒤적인다. 정리하는데, 막걸리 한 병이 불쑥 보인다. 가평잣生막걸리. 어쩌다가 저 막걸리는 가평을 떠나서 제천, 이제는 오산 수청동까지 슬그머니 침입했던 것일까. 기억을 애써 되감아 본다.

칠월 초. 어릴 적 친구들과 충주와 제천 여행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코로나가 잠시 주춤하고 살며시 방심할 즈음이었다.

토요일 점심 때, 펜션에 도착하니 이윽고 장맛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장맛비는 저녁이 되고 새벽이 오는데도 그치지 않고 퍼부어댔다.

덕분에 방에 갇힌 친구들은 마주앉거나 옹기종기 술판이 벌어진 식탁에 모여서는 먹고 마시고 고성방가 유행가 노래까지.

노래가 아니면 다시 왁자하거나 시시콜콜한 잡스런 농담을 하염없이 주고받았을 테다. 동시에 우리는 웃고 떠들고는 아마 그랬을 테다.

늘 친구끼리는 이 모양이다. 웃음과 재미가 항상 들끓어 넘친다. 그렇다. 웃음과 재미, 이것들은 언제나 친구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만 시작되게 마련이다. 반짝반짝 추억으로 쌓여서는 빛난다. 언제나 또 그날이 오려나. (아, 옛날이여!)

앞의 시는 안도현 시인이 엮은 '검은 시의 목록'(걷는사람, 2017년)에 보인다. 이 책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시인들의 시를 99편 뽑고 추려서 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쨌거나 ‘블랙리스트’에 대해 책의 엮은이 안도현은 이처럼 의미심장한 글로 독자를 향해서 설명한 바 있다.

시인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남 앞에 나서는 걸 어려워하고 큰 목소리를 내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글을 쓰는 대신 거리로 나서고 시국선언에 동참하여 정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한 대가로 ‘블랙리스트’라는 멍에이자 자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들의 시를 모은 것입니다. (중략) 누군가는 이들을 검은색 한 가지 색으로 칠하려 했지만, 시인은 그리고 인간은 한 가지 색으로 칠하고 억압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작품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역시 이들은 검은색으로 묶을 만한 분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같은 책, 5쪽 참조)

책이 나온 지, 벌써 5년차이다. 함민복의 「막걸리」란 제목을 단 시를 가만히 가까이에서 찬찬히 읽어보자. 그러면 ‘검은색 한 가지 색’으로 칠하는 불온한 시, 정치적(?) 색깔의 시로 분류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다. 그것이 확인된다.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실제로 막걸리 한 병을 놓고 자세히 보았다. 그랬더니 “윗물은 맑은데/아랫물이 맑지 않다”가 현실로 한눈에 들어온다. 친구들과 모여서 안주로 부추전이나 호박전, 김치전 등을 준비해서 막걸리를 상에 놓고 시의 전문을 우리들 다 같이 실컷 낭송해 보자.

“윗물이 맑은데/아랫물이 맑지 않다니/이건 아니지/이건 절대 아니라고/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마구 흔들어 마시는/서민의 술/막걸리”

시의 행간 사이로 한바탕 장맛비가 쏟아지거나, 아니면 어쩌면 푸른 물결이 햇볕에 반짝이는 저수지, 호수, 강, 바다 등의 정자나 언덕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술 한 잔 하는 시간이 얼른 상상이 될 테다. 이 시가 지닌 고유한 품격이자 매력일 테다.

“문여기인<文如其人>”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로 쓰이는 사자성어다. 제천 펜션에서 한 친구가 농담 삼아서 “너는 글과 사람이 같지 않아”하고 말했는데,

실은 충고가 따끔했지만 맞다. 맞는 얘기다. 아직 나는 함민복 시인처럼 경계를 허물지 못한 하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릇 고향을 떠나 낯선 친구와 처음 만나는 모임에서는 함민복<咸敏復, 1962~ > 시인의 귀띔처럼 농담을 주고받을 일이다.

이를테면 막걸리를 놓고 윗물만을 고고하게 마시려들지 말고 제발 나를 “거꾸로 뒤집”어 놓기도 하고 “마구 흔들어”서는 내려놓자. 그리하여 한 가지 색깔로 친구들 마음에 섞이는 것이다. 이게 아직도 나는 부족하다. (친구, 아니 그런가?)

이따금 내 아버지의 옛날식 막걸리집이 그립다. 중년의 남자들만 모인 술자리에 어린 주모가 불쑥 끼어들며 한복 치맛자락 휘날리며 희디 흰 새끼손가락을 잔에 넣고 저어주는 향수(鄕愁)의 서비스가 지금은 어디에서도 눈 씻고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외식업 상권 지도와 골목길에는.

어쨌거나 화가 도상봉의 '동해풍경'(1973년 作)에 나오는 해송군락지와 비슷한 분위기의 경주 바닷가, 혹은 강화도, 아니면 내가 잘 가는 궁평항 해송군락지에서 대화가 되는, 요컨대 상단전 궁합이 잘 맞는 친구들끼리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꼭 같이 찾아갈 것이다. 막걸리에 해물파전, 파도소리에 취해서 낮술로 좀 놀아보다가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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