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2.08. P.54-57 Discovery]

여름인기메뉴 콩국수 ⓒ한국외식신문
여름인기메뉴 콩국수 ⓒ한국외식신문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콩국수는 냉면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나라 대표 여름 별식이다. 그런 만큼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의 망설임 못지않게 냉면과 콩국수의 선택 또한 여름엔 그 나름으로 심각한(?) 갈등의 소재가 됐다. 짜장면과 짬뽕은 짬짜면으로 간단히 해결된 측면이 있지만 냉면과 콩국수는 아직 둘이 하나로 합체(合體)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콩국수와 냉면의 선택은 어떤 면에선 사회적 갈등이기도 했다. 외식이 어렵지 않아진 현대에는 전혀 이해 못 할 소리로 들리지만 예전엔 달랐다. 냉면은 집에선 만들어 먹기 힘든, 그래서 전문 냉면집에 가서 사 먹어야 하는 대표적 외식 메뉴였다. 

콩국수는 달랐다. 어머니가 혹은 할머니가 집에서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뚝딱 만들어주던 대표 가정식이었다. 그러니 애꿎게 철없는 아이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 좋고 싫고를 떠나 외식을 하고 싶은데 집에서 콩국수를 만들어 먹겠다니 그냥 심술이 났다. 그래서 심통을 부렸고 콩국수까지 미워했다. 1960~70년대 이야기다. 

이런 향수 어린 콩국수를 우리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여름 더위를 단숨에 날려주는 기막힌 음식을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콩국수의 역사가 100년 남짓?

맛은 있지만 단순하기 그지없는 콩국수 같은 음식, 누가 만들었다고 할 것도 없이 저절로 생겨났고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옛날부터 먹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콩국수는 보기와는 달리 음식 문화사적으로 복잡 오묘한 음식이다. 당연히 먼 옛날부터 먹었을 것이라는 상식적 추측과는 달리 역사가 무지무지하게 짧다. 근현대에 생겨난 음식이다. 기껏해야 100년을 살짝 넘었을 뿐이다. 

콩국수가 우리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시의전서>라는 요리책이다. 이 책은 1919년 발행본이 현재까지 전해지는데 원본은 19세기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기에 콩국수의 역사를 짧게 보면 100년, 길게 봐야 150년 남짓으로 짐작한다. 

여름 별미의 또 다른 쌍두마차 냉면은 17세기 초부터 그 이름이 문헌에 나온다. 조선 중종 때 장유(張維)가 남긴 자줏빛 육수의 냉면이라는 시다. 그러니 우리 조상님들이 냉면을 먹기 시작한 역사는 최소 400년을 넘는다. 게다가 냉면은 양반들의 고급 별미로 발달했다. 최초의 냉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초창기부터 냉면을 즐긴 사람들은 고위 관직에 있는 양반과 부자, 순조·철종·고종과 같은 임금들이었다. 

이런 냉면을 400년 전부터 먹었는데 흔해빠진 콩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콩국수의 역사가 기껏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근거로 제시한 <시의전서> 이전 문헌에도 콩국수가 있었는데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문헌에 콩국수라는 음식 이름이 보이지 않을 뿐 옛날엔 얼마든지 콩국수를 먹었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음식문화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콩국수는 역시 19세기 말에 비로소 생겨난 음식이 맞는 것이다. 콩국수의 역사를 이렇게 짧게 보는 이유는 콩국수의 특성 때문이다. 지금은 당연한 음식으로 여기지만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콩국수는 상상하기 힘든 음식이었다. 국수와 콩국의 조합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옛날부터 국수를 포함한 밀가루 음식이 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에선 조선말까지만 해도 밀을 많이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수를 포함한 밀 음식은 밀의 수확철인 여름에 양반집, 부잣집에서나 주로 별식으로 먹었다. 그렇게 귀했던 만큼 국수는 잔칫날이나 먹는 음식이었고, 그래서 잔치국수라는 음식이 생겼다.

메밀국수 또한 마찬가지다. 메밀을 빻아 가루를 내어 국수로 뽑으려면 곡식의 손실이 매우 많아진다. 귀한 식량을 낭비하는 꼴이기에 메밀국수까지 포함한 옛날 국수는 그렇게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반면 콩국은 달랐다. 지금은 두유가 건강 음료로 인기가 높지만 옛날 콩 국물은 서민들이 양식이 떨어졌을 때 밥 대신 한 그릇 퍼마시며 허기를 달랬던 그런 음료였다. 대표적인 서민 내지 빈민 음식의 상징이었고 그렇기에 양반들이 청빈을 이야기할 때 콩 국물 마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이런 콩 국물에다 귀한 밀가루 국수를 말아서 먹는다는 것은 그래서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마치 현대에 최고급 한우 꽃등심을 묵은지에 넣고 묵은지찜을 해먹는 것과 비슷하고 최고급 생선회를 생선뼈와 함께 넣어 매운탕 끓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콩 국물과 국수의 조합으로 이뤄진 콩국수가 냉면보다 훨씬 늦은 19세기 말에야 등장했던 것이다. 

원조는 깻국인 임자수탕

그러면 옛날 조상님들은 콩국수 대신 무엇을 먹었을까? 그저 냉면만 먹었을까?

기 중반의 풍속서 <동국세시기>에도 여름 계절음식으로 밀국수를 오이와 닭고기를 넣은 백마자탕(白麻子湯)에 말아 먹는다고 했다. 백마자탕은 참깨를 갈아 만든 깻국, 임자수탕(荏子水湯)은 들깨를 갈아 만든 깻국이다. 

참깨가 됐건 들깨가 됐건 깻국은 그저 그런 평범한 음식이 아니다. 지금은 중국산 깨 때문에  참기름, 들기름이 흔해졌지만 옛날 할머니들은 병에 흐르는 한 방울의 참기름조차 아까워 손가락으로 훑어 먹었을 정도로 귀한 기름이었다. 들깨로 짜는 들기름 역시 참깨만큼은 아니었지만 시골에선 아껴 먹었던 기름이었다.

이런 참깨와 들깨를 갈아서 국수 말아 먹을 국물을 만들었으니 한여름에 어쩌다 먹는 별미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부잣집에서나 먹는 별식이었다. 부자들의 여름 별미이긴 했지만 어쨌든 동양에서 들깨, 참깨를 갈아 만든 임자수탕, 백마자탕을 여름철 계절 음식으로 먹은 역사는 무척 깊다.

중국 송나라에서 궁중 어의들을 모아 여름철 음료를 만드는 경연대회를 열었다. 다양한 종류의 여름 음료가 선을 보였는데 그중에서 들깨죽이 일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송 인종은 한림원에 명을 내려 들깨를 넣어 여름에 더위를 쫓는 음료로 만든 후 신하들에게 하사하기까지 했다. 

옛사람들은 왜 여름 별미로 특별히 임자수탕을 먹었을까? 단순히 시원하기 때문에 혹은 맛있고 영양이 넘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전통 시절음식이 그렇듯 깻국이 여름 별미 음식이 된 데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이유가 있다. 물론 콩국수도 마찬가지다. <본초강목>에 들깨는 몸의 열을 내려주고 냉기를 치유하며 소화를 돕는다고 나온다. 입맛 떨어지고 더위에 지쳐 탈이 나기 쉬운 여름에 안성맞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엔 솔잎 가루 세 수저, 밀가루 한 수저, 검은 콩 한 수저, 들깻가루 한 수저를 꿀과 함께 정화수에 넣어 21일을 복용하면 온갖 병이 말끔히 치료될 것이라고 했으니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요즘도 몸에 좋다고 해서 들깨를 꿀에 재어 먹는 근거다.

이런 들깨 그리고 그보다 더 비싼 참깨로 국물을 만들어 국수를 말아 먹었으니 옛사람들은 깻국 국수를 단순한 여름 별미를 넘어 여름 보양식으로 여겼다. 다만 옛날엔 너무 비쌌기 때문에 쉽게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반면 콩국은 철저히 서민 음식이다. 콩 국물은 먼 옛날부터 조상들이 자주 마시던 음료였지만 지금 두유처럼 건강 음료로 마셨던 것이 아니다. 콩을 갈아 국물을 만들어놓고 배고플 때 부족한 양식 대신 수시로 콩국을 마시며 끼니를 대신했다.

18세기 초,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모두 귀한 사람들에게나 돌아가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콩뿐이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춘궁기에 곡식이 떨어지면 대신 콩국을 마시며 지낸다는 기록을 남겼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최익현 역시 일제에 잡혀갔을 때 쓴 편지에서 햇곡식이 나오려면 까마득하게 남았는데 부엌의 콩국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걱정된다며 고향집 살림을 걱정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콩 국물을 많이 먹었을까? 지금은 콩값이 쌀값의 2배 정도로 비싸지만 예전엔 콩이 정말 흔했으니 감옥에서 콩밥을 제공했고, 그래서 감옥 간다는 말 대신 콩밥 먹는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약식동원’에 걸맞게 좋은 음식

그러면 콩국수 같은 음식이 어떻게 생겼을까? 단순하게 보면 콩국이 재료값이 비싼 임자수탕을 대체하면서 결국 지금의 콩국수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명확한 설명은 없지만 옛 문헌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콩국수 관련 기록이 제일 먼저 실린 <시의전서>도 그중 하나다. <시의전서> 레시피에 콩국수는 불린 콩을 살짝 데친 후 갈아서 소금 간을 한 후 밀가루 국수를 말아 깻국처럼 고명을 얹어 먹는다고 나온다. 콩국수가 임자수탕을 참고한 음식임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세시풍속사전>에도 조선 말, 삼각산의 진관사 스님들도 여름이면 계곡에서 콩과 들깨를 갈아서 만든 국수를 별식으로 먹었는데 깻국, 한자로는 임자수탕이라고 했다. 콩과 들깨로 국물을 만드는 임자수탕은 콩 국물이 중심이면 콩국수가 되고 들깨를 많이 넣으면 깻국인 임자수탕이 된다. 그러니 비싼 깨의 비중을 줄이고 대신 콩국의 비중을 높이면서 콩국수가 대중화됐을 것이다.

물론 콩 국물이 깻국을 대신하게 된 것 역시 단순히 콩국이 값이 싸고 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콩국은 맛이나 색이 깻국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콩 또한 약식동원이라는 말에 걸맞게 좋은 음식이다. 옛날 동양 의학서를 보면 하나같이 콩의 특별한 효능을 강조해놓았는데 <본초강목>도 그중 하나다. 콩을 먹으면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장기간 복용하면 피부에 윤기가 흐른다고 나온다. <신농본초경>에선 들깨를 장기간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콩은 반대로 사람의 몸을 무겁게 만든다고 했으니 그만큼 영양가가 높다는 소리다.

이런 콩으로 만든 콩국수이니 부자들의 여름 별미이자 보양식이었던 임자수탕을 대신했을 것이다. 역시 콩국수는 여름철 별미로 냉면과 어깨를 견줄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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