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3.08. P.58-61 Discovery]

 초계메밀국시 ⓒ한국외식신문
 초계메밀국시 ⓒ한국외식신문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삼복더위에 몸보신은 해야겠는데 아무리 이열치열이라지만 뜨거운 음식은 역시 부담스럽다. 그래도 삼계탕에 버금가는 보양식을 한 번쯤은 챙겨 먹어야 여름을 제대로 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럴 때 많이 찾는 음식이 초계탕이다.

초계탕은 차갑게 식힌 닭고기 육수에 식초와 겨자로 간을 한 후 닭고기를 잘게 찢어 넣어 먹는 음식이다. 혹은 초계국수처럼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여기에 오이, 백김치, 배 등을 돌려 담아 시원한 닭 국물과 함께 먹으니 다른 여름 보양식에 지치고 물렸다면 몸보신을 겸해 새롭게 한 번쯤 맛볼 만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맛도 좋고 몸에도 이롭다는 초계탕, 초계국수인데 썩 익숙한 음식은 아니다. 그렇기에 현대에 들어 소득수준이 높아진 이후에 개발된 현대판 여름 보양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초계탕은 역사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뿌리 깊은 우리나라 전통 보양식이다. 게다가 옛날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보통 음식이 아니었다.

왕실, 그것도 왕실 어른의 잔칫상에서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차려진 요리였다. 특별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초계탕, 인문학적으로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음식일까?

혜경궁 홍씨는 왜 초계탕을 드셨을까?

초계탕을 처음 먹어본 사람은 문헌 기록상 18세기 후반, 정조의 어머니이며 사도세자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였다.

지금으로부터 230년쯤 전인 1795년 음력 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한양에서 100리 길을 떠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지금의 화성 융릉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수원의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연회를 갖고 어머니를 위해 성대한 환갑잔치를 열었다.

이때의 회갑잔치를 기록한 책이 <원행을묘정리의궤>인데 다양한 산해진미 요리들이 차려졌지만 특별히 예전엔 보지 못했던 요리가 하나 추가됐다. 바로 초계탕이다. 참고로 음력 2월 중순이면 아직 추울 때인데 웬 초계탕이었을까 싶지만 이때의 초계탕은 지금처럼 찬 음식이 아니었다.

혜경궁 홍씨가 초계탕을 먹은 기록은 또 있다. 사실 혜경궁 홍씨의 생일은 음력 6월 18일이다. 그러니까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연 회갑연은 미리 당겨서 연 것인데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엔 진짜 생일인 6월 18일에도 정조가 모친을 위해 잔칫상을 차렸다고 나온다. 임금과 문무백관이 모두 찾아와 축하 인사를 올렸는데 이때에도 초계탕이 빠지지 않았다.

초계탕에 관한 기록은 또 있다. 왕의 동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일성록>엔 혜경궁 홍씨의 환갑이 지나고 3년이 지난 후인 1798년 6월 22일, 그러니까 생일이 지난 3일 후에도 초계탕을 올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혜경궁 홍씨는 왜 그렇게 세 번씩이나 초계탕을 드셨을까? 그것도 굳이 생일에 초계탕을 먹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혜경궁 홍씨가 유난히 초계탕을 좋아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초계탕이 특별한 요리였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해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어머니 생신상에 특별한 별미를 자주 올렸던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초계탕은 정조 때 문헌에 처음 보인다. 그러니 이 무렵 개발해 퍼진 별미 요리였을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크게 주목할 것 없어 보이지만 조선 후기엔 초계탕이 심상치 않은 요리였던 것은 틀림없어 보이는데 남아 있는 기록에서 초계탕이 어떤 음식이었는지 그 정체를 엿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가 환갑잔치를 치른 후 약 33년이 지난 1828년엔 정조의 아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가 40세 생일을 맞았다. 이때의 생일 축하잔치에 초계탕이 차려졌고 1848년의 육순 잔치에도 잔칫상에 초계탕이 올랐다.

그리고 1848년(헌종 14년) 2월, 창경궁 통명전에서 열린 대왕대비 생일잔치와 고종 때 덕수궁 경운당에서 열린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71세 생일잔치 때 초계탕이 보인다. 그리고 1901년 황제가 된 고종의 50세 생일잔치에 초계탕을 올린 이후엔 고종 생일에 네 차례, 순종 생일에 두 차례 초계탕을 차렸다.

생일상이 아닌 경우에도 초계탕이 오른 경우가 있다. 한번은 고종 10년인 1873년, 불에 탔던 경복궁 강녕전(康寧展)을 재건한 것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렸다. 강녕전은 임금이 잠을 자는 침실로 잠을 잘 자야 만수무강할 수 있다는 뜻에서인지 이름이 강녕전이다. 강녕이란 편안할 강(康) 편안할 녕(寧)이란 한자 뜻 그대로 편안하고 안녕하라는 의미다. 이 축하연에 차려진 음식이 초계탕이다.

1902년은 고종황제가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해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물러난 원로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으로 일종의 국가 원로자문기구다. 이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렸는데 이때에도 초계탕이 준비됐다.

신하들의 상엔 보이지 않은 초계탕

정조 때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에서부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생일잔치까지 잔칫상에 초계탕이 차려진 것은 기록상 20차례 남짓인데 주목해볼 만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왕실 잔칫상에서 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좋은 음식이라고 시도 때도 먹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나 왕비,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 어른들의 생일상 혹은 강녕전 재건 축하연, 고종의 기로소 입소 축하연 같은 왕실 어른들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잔칫상에 차려진 음식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초계탕엔 생일에 장수를 축원하는 음식, 나아가 연로한 어르신들의 평안함을 기원한다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둘째는 초계탕이 주로 왕과 왕비, 대왕대비의 생일상에 주로 보인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생일상마다 초계탕을 준비한 것도 아니다. 각종 의궤를 비롯해 초계탕이 보이는 생일 잔칫상을 보면 뚜렷한 특징이 있다. 대한제국 설립으로 황제가 된 고종과 순종의 생일상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환갑이나 칠순 잔치 또는 10년을 주기로 전환점이 되는 40세, 50세와 같은 꺾어지는 해가 되는 특별한 생일잔치에 초계탕을 장만했다.

또 하나, 의궤를 자세히 살펴보면 왕실 가족의 상엔 초계탕이 놓여 있는데 신하들의 상엔 초계탕이 보이지 않는다. 초계탕이 고급 요리였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초계탕이 남다른 음식, 각별한 요리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셋째, 초계탕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정조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데 닭고기가 이때부터 흔해졌기 때문은 분명 아닌 만큼 애써 원인을 찾는다면 초계탕의 재료가 되는 식초와 겨자 양념이 이유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새콤하면서 코끝을 톡 쏘는 식초와 겨자 양념장이 널리 퍼진 것은 17~18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엔 17세기 말,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의 장례식 음식에 초계탕이 쓰였다고 하는데 동아시아에선 식초가 이때부터 대량으로 보급됐기 때문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 또한 18세기 양조산업이 발달하면서 식초가 대중화됐고 그 덕에 초밥인 스시가 퍼졌다. 조선의 초계탕 역시 이런 식초의 보급에 따른 초계탕의 확산과 맞물리면서 왕실의 특별한 잔치음식으로 발달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문헌적 근거는 없다.

닭, 식초, 겨자… 뭣이 중헌디?

어쨌거나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무리 봐도 초계탕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데 옛날 조선에선 왜 초계탕을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것일까?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옛날엔 일단 닭 자체가 보양식이었다. 보양식이 되려면 먼저 양기가 충만해야 하는데 가축 중 소고기는 양의 기운이 부족하고 돼지고기는 음기가 강한 데다 위생상 여름에는 피했으며, 개고기는 양의 기운은 강했지만 예전에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반면 닭은 <주역>에서 양의 기운이 넘치는 동물이라고 한 데다 <본초강목>에선 석영을 먹여 키운 영계는 양기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쇠약해진 기운을 보충하고 몸을 튼튼히 하며 피부에 탄력을 더해주는데 영계를 먹으면 겨울에도 추운 줄 모른다고 했을 정도다.

옛날 사람들은 이렇듯 닭에 대해 환상을 품었으니 영계백숙을 보양식으로 삼았던 것인데 이런 영계에다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귀한 영약인 인삼까지 더한 것이 삼계탕이니 기묘한 효과를 발휘하는 신비한 묘약으로 여겼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초계탕도 신묘하기가 삼계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주재료인 닭의 약효야 삼계탕이나 초계탕이나 마찬가지일 것인데 인삼 대신 들어가는 식초와 겨자의 효과가 또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은 식초가 지극히 평범한 조미료에 지나지 않지만 인류가 만든 최초의 조미료인 식초를 고대 의학서에선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위와 간을 보양해주며 소화를 돕는 식품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국 송나라 때 휘종의 황후가 병이 들었는데 낫지 않자 전국의 명의를 모두 불러 약을 짓게 했는데 이때 만든 약 스무 가지에 모두 식초가 기본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렇듯 옛날 동양에서 식초는 단순한 조미료 이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코끝을 톡 쏘는 겨자는 입맛을 돋우는 역할도 하지만 음식을 소독하는 역할도 한다. 그러니 겨자로 간을 해 보양은 물론 위생에도 각별히 신경 쓴 것인데 옛날엔 초계탕에 전복과 해삼, 버섯까지 더했다고 하니까 특별히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장수 보양식으로 삼았을 만도 하다.

무더운 여름, 삼계탕에 식상해 대신 먹는 보양식 초계탕엔 뜻밖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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