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3.09. P.72-75 Discovery]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명동교자의 칼국수 ⓒ한국외식신문
명동교자의 칼국수 ⓒ한국외식신문

우리가 낮에 먹는 식사인 점심, 만두 등으로 간단하게 먹는 중국(홍콩)요리 딤섬 그리고 차와 곁들여 먹는 다과, 즉 화과자인 일본의 덴싱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점심과 딤섬, 일본 다과의 기원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안 되지만 일단 한자가 그 증거다. 나라별로 발음은 달라도 모두 점심(點心)이라고 쓴다. 아무리 그래도 음식은 고사하고 개념 자체가 다른데 점심과 딤섬, 덴싱을 놓고 왜 뿌리가 같다는 것일까?

연원을 따져보면 흥미로운 음식 발달의 역사가 있다. 먼저 점심이란 무엇일까? 아침이나 저녁이 아닌 낮에 먹는 식사다. 다른 말로는 중간 식사라는 뜻에서 중식(中食), 낮에 먹는 음식인 오찬(午餐)이다. 점심은 얼핏 순우리말 같지만 실은 한자어다. 점 찍을 점(點) 마음 심(心)자를 쓴다. 왜 낮에 먹는 식사를 놓고 마음에 점을 찍는다고 했을까?

중국도 점심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보통 딤섬(Dimsum)이라고 하는데 홍콩을 중심으로 퍼졌기에 광둥 발음이 됐다. 우리는 딤섬을 중국식 만두요리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뜻은 아니다. 가볍게 먹는 식사라는 뜻이다. 만두뿐만 아니라 죽이나 꽈배기도 딤섬이 된다. 밥과 요리를 제대로 차리지 않은 식사,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분식집에서 부담 없이 먹는 음식이 딤섬이다.

일본에서도 점심이라는 한자를 쓴다. 일본말로 덴싱(てんしん)이다. 중국 딤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본어 사전을 찾아보면 차를 마실 때 함께 먹는 가벼운 간식 내지는 과자라는 풀이도 있다. 쉽게 말해 양갱이나 만주(饅頭)를 비롯한 일본의 화과자(和菓子)가 덴싱이다.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과 딤섬, 덴싱

그러면 점심이 왜 한국에선 낮 식사, 중국은 가벼운 식사, 일본은 차와 함께 먹는 간식이라는 뜻이 됐을까?

점심의 한자는 음식이나 식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점 찍을 점(點)에 마음 심(心)이니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데 이에 대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이 정의를 내렸다. 점심은 허기져 출출해진 것을 조절하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출출하다는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허기진 마음에 점을 찍는 것처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어 배고픈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점심이라는 풀이다. 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오찬을 점심이라고 하는데 많이 먹으면 점심이 아니다. 점심이라는 것은 소식(小食)의 명칭인데 오찬이라도 적게 먹으면 점심이라고 일러도 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시장함을 달래기 위해 가볍게 먹는 것이 점심이라는 것이니 알듯 모를 듯 헷갈리는데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식사의 역사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끼를 꼬박 챙겨 먹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 고대엔 신분에 따라 식사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황제는 하루 네 번, 제후는 세 끼를 먹었고 관리는 아무리 벼슬이 높아도 아침과 저녁 하루 두 차례 먹었다. 혹자는 임금은 하루 대여섯 번 먹었다는데 무슨 소리냐며 반문할 수 있겠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의 일인 데다 정식 식사가 아닌 요즘 말로 간식이 포함된 횟수다.

신분에 따른 식사 횟수가 정해진 것은 서기 79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정한 한나라 때의 백호관회의였다. 먹는 횟수를 정할 정도니 터무니없는 모임 같지만 전국의 유학자들이 모여 삼강오륜과 같은 사회규범을 결정한 회의다.

황제와 왕을 제외한 사람들이 하루 두 끼만 먹었던 시절, 시장기를 달래줄 가벼운 요깃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간식으로 먹게 된 것이 바로 점심이었는데, 언제부터 점심을 먹기 시작했을까? 기록을 보면 대략 1200년 전 당나라 때부터다. 명나라 때 문헌인 <칠수유고>에 점심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인다.

“당나라 정참이 강회유후로 있을 때 집안사람이 부인의 새벽밥을 준비하니, 부인은 그의 아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치장을 아직 마치지 못했고 나는 밥 먹을 시간이 아직 못 되었으니, 너는 점심을 하도록 하라.”

지금과 달리 아침 식사 전 공복을 채우는 음식을 보고 점심이라고 했던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칠수유고>의 이 글을 인용해 당나라 때 이미 점심이란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렇듯 허기진 마음을 채우며 간단하게 먹는 것이 점심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 문화권에서 지역에 따라 읽는 방법이 달라졌고 의미까지도 차이가 생겼다. 그렇다면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점심은 각각 어떻게 발전했을까?

점심과 딤섬의 발달은 하루 두 끼 식사가 발단?

점심이 우리나라에서 낮에 제대로 먹는 식사를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조선시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중반 인물인 성호 이익이 “우리나라에서는 오찬을 점심이라고 부른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이미 점심이 낮에 먹는 식사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보통의 경우는 하루 두 끼를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후반부터는 하루 세 끼를 먹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지만 그 이전엔 보통 두 번의 식사를 했다.

조선의 관리들은 도시락을 싸 갖고 출퇴근을 한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식사가 제공되거나 외식을 했는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관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준다고 기록해놓았다. 정조 때 실학자인 이덕무도 <청장관전서>에서 사람들은 하루에 아침과 저녁으로 다섯 홉의 곡식을 먹는다고 했으니 역시 하루 두 끼 식사가 일반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로 가면서는 하루 세 끼로 식사 횟수가 늘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순조와 헌종 때 활동했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쓴 점심변증설에서 점심은 원래 조금 먹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지금은 오후에 먹는 식사가 양이 많으니 점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적어놓았다. 오후에 새참으로 간식처럼 먹는 것이 점심인데 그 양이 적지 않으니 새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끼의 식사를 했다는 뜻이 된다.

중국의 딤섬은 마음에 점을 찍듯 가볍게 먹는 식사라는 뜻에서 시작해 지금은 아예 보통의 식사를 능가하는 별도의 요리가 된 느낌이 없지 않다. 딤섬으로 널리 알려진 광둥어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딤섬은 홍콩에서 발달해 세계로 퍼졌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발전하기 전 영국의 영향 아래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였던 홍콩에서 유행해 서양으로까지 전해졌고, 거리의 분식집은 물론이고 호텔에서도 먹는 고급 요리로 유명해졌다.

흔히 중국식 작은 만두요리를 보고 딤섬이라고 하는데, 실은 간단하게 식사처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모두 딤섬이 될 수 있다. 홍콩에서 주로 먹을 수 있는 딤섬 종류만 해도 200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만두 종류이기 때문에 만두요리가 곧 딤섬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딤섬 전문점의 만두를 간단히 구분하자면 찐만두인 쩡자오(蒸餃)와 같은 교자만두, 샤오롱바오(小籠包)와 같은 포자만두, 사오마이(燒賣)라는 열린 만두, 소가 없는 찐빵 종류인 만터우(饅頭), 스프링롤인 춘권(春捲) 종류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작고 투명한 것은 자오(餃), 껍질이 두터운 것은 바오(包), 만두의 윗부분이 봉해져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을 마이(賣)라고 하는데 교자만두인 자오와 포자만두인 바오를 좀 더 정확히 구분하자면 밀가루를 발효시킨 것은 포자인 바오, 생반죽으로 빚은 것이 교자인 자오다.

딤섬 중에서 대표적인 교자만두가 하가우(蝦餃)인데 광둥어로 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광둥 음식으로 새우를 넣어 찐 만두다. 만두피로 얇고 반투명한 전분을 쓰는 하가우는 만두를 빚을 때 12개 이상으로 주름을 잡아 머리빗 모양으로 빚는 것이 관건이다. 맛과 함께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게 요리사의 능력이다.

화과자는 딤섬의 일본 현지화 결과물

널리 알려진 딤섬으로 만두 속에 육즙이 가득 들어있는 샤오롱바오는 작은 찜통에 찐 만두라는 뜻이다. 19세기 중반 상하이의 한 만두집에서 개발했는데, 딤섬의 유행에 기여한 음식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만두 속의 즙을 마시는 샤오롱바오의 뿌리는 멀리 송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딤섬의 대표 격인 사오마이는 끝 부분을 밀봉하지 않고 꽃모양으로 꾸민 만두다. 초기의 사오마이는 원나라 때 찻집에서 발달한 만두로 알려져 있는데 만두를 찔 때 꼭대기를 밀봉하지 않은 이유는 손님에게 직접 만두소의 내용물을 눈으로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만두소의 종류가 너무 많아 소고기가 들었는지 혹은 양고기가 들었는지, 파와 함께 넣었는지 무와 두부를 넣었는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만두 등으로 대표되는 딤섬은 일본 화과자 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2세기 무렵 일본 승려들이 대거 송나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면서 그때부터 중국의 차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동시에 차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가벼운 간식인 중국의 딤섬도 일본에 덴싱(てんしん)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이때 들어온 음식이 만두와 고깃국, 찹쌀떡 종류였다.

그런데 중국의 가벼운 먹거리가 일본에선 엉뚱하게 변했는데 거기엔 변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다. 일단 중국 음식들은 대부분 귀국 승려를 통해 사찰을 중심으로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은 육식을 금지했기 때문에 일본에 맞는 현지화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중국식 고기만두 대신에 팥을 넣은 만주와 찐빵(あんまん)이 만들어졌고 양고기로 끓인 중국식 양갱(羊羹) 대신 팥으로 만든 현재의 양갱이 생겼다. 중국의 딤섬이 일본에선 엉뚱하게 화과자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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