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혁의 음식이야기

[음식과사람 2023.10. P.80 Food  Essay]

재래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가지' ⓒ한국외식신문
재래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가지' ⓒ한국외식신문

editor 윤동혁

늙고 여러모로 빈궁한 72세 현역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가까운 나라라고 해도 해외로 나가는 데는 걱정과 준비가 필요했다.

오른쪽 무릎 관절이 이상 징후를 보이며 야트막한 동산도 오르내리기가 전 같지 않은데 왼쪽 발에 족저근막염이 찾아왔다. 포기할까? 그러나 오래 묵혀두었던 마일리지로 항공권은 예약된 상태. 그래, 조심조심 다녀오자.

일본 북해도 신치토세 공항에서 특급열차, 한 칸짜리 전동열차, 시외버스를 골고루 갈아타며 도착한 곳은 유바리. 시(市)라고는 하지만 한적하기 짝이 없는 마을 여러 개가 뜨문뜨문 흩어져 있어서 유흥문화를 찾는 이에겐 절대 권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왜 그런 곳에 갔느냐 하면, 일본에서도 고령화가 가장 빨리 진행되는 곳이고 파탄에 빠진 지방자치단체가 어떻게든 회생을 도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에 끌려간 조선 사람들이 탄광에서 일하다 많이 숨진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먼저 석탄박물관을 찾았다. ‘석탄에서 관광으로’란 구호가 눈에 띄었고 막장에서 작업하던 모습을 잘 재현해놓았다. 볼 만했으나 조선인 광부들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숨진 조선인 광부들의 위령탑에 절하고 마을로 돌아와 한잔 걸칠 장소를 찾았으나 일본 도처에 널려 있는 이자카야 한 집 없는, 그런 동네였다.

숙소 주인에게 물었더니 스나쿠(스낵의 일본 발음)가 하나 있지만 예약이 있을 때만 문을 연다고 했다. 손님이 없는 날이 더 많기 때문에. 그래서 당일 예약으로 ‘엘리스’라고 이름이 예쁜 스나쿠를 찾아갔다. 숙소 주인은 그곳 마마(여주인)가 42세라고 했다.

카운터에는 나보다 훨씬 나이 든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내가 마흔두 살이라고? 지금 내 나이에서 마흔두 살을 빼면 그렇게 되지, 제대로 속았네.”

나는 속은 게 즐거웠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연로한 스낵바의 여인과 담소하며 한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마마보다 두 살 아래(그래도 여든두 살이다)인 남편이 자기 아내와 내가 수다 떠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술맛을 돋워주었다.

마마는 유바라 탄광의 가혹하고도 슬픈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나이의 할머니가 일본의 어느 스나쿠에서도 맛볼 수 없는 안주를 만들어주었다. 가지나물. 그때 마신 술의 이름이 가게 간판에 써 있는 엘리스였는데 고구마소주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 술과 가지나물의 조합은 복잡미묘했는데 가지나물이 나올 때 이미 취한 상태라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할머니 마마가 처음 내온 안주는(내가 생선을 좋아한다고 알려준 숙소 주인의 정보에 따라) 급하게 준비했다는 생선회 작은 모둠(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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