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3.12. P.76-79 Discovery]

포기김치 ⓒpixabay
포기김치 ⓒpixabay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속이 꽉 찬 배추에 고춧가루 양념을 채워 넣고 버무려 숙성시킨 배추김치다.

나라 안팎에서 한식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음식인 김치를 우리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특히 속이 꽉 찬 배추김치, 다시 말해 김장김치는 언제부터 서민들의 밥상에 올라왔을까? 그리고 다소 거창한 화두 같지만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먹는 김치가 만들어지기까지, 특히 배추김치의 탄생 배경과 역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한 식품이기에 우리는 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김치의 역사에 대해선 썩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기에 김치, 그중에서도 배추김치가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역사를 짚어보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fact & history)을 알 수 있고, 또 인문학적으로 배추김치가 얼마나 대단한 식품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한민족은 언제부터 김치를 먹었을까? 사실 이런 질문은 대답 자체가 불가능하다. 김치의 정의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김치 종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채소를 절여 숙성시킨 식품을 김치라고 정의한다면 김치는 먼 고대부터 먹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엔 전해지는 문헌이 없으니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중국은 춘추시대 문헌인 <시경>에 절인 채소가 보인다. ‘밭 둔덕에 참외(瓜)가 있으니 깎아서 절여(菹) 조상님께 바치자’라는 구절이다. 일부 중국인들이 이 구절을 인용해 김치의 원조가 중국이라는 헛소리를 하는데 한마디로 무지해서 그렇다. 그런 식이라면 김치의 원조는 고대 이집트라고 해야 한다. 시경이 나오기 수백 년 전에 이미 오이를 절인(pickled) 식품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단순한 채소절임 이상의 다양한 김치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내지는 삼국시대 이전일 것이다. 예컨대 12세기 고려 중기 <동국이상국집>엔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을 시로 읊으며 무로는 김치를 담았다고 노래했다.

15세기 조선 초의 <세종실록>에도 제사를 지낼 때는 부추김치(韭菹), 무김치(菁菹), 미나리김치(芹菹), 죽순김치(笋菹)를 올린다고 나온다. 이 무렵 이미 김치가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 배추김치는 보이지 않는다.

슈퍼스타, 그 위대한 탄생

그러면 한국의 김치 하면 거의 자동으로 떠오르는 배추김치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역시 대답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는데 일단 김장김치는 19세기 중반이다. 뜻밖에도 역사가 15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고춧가루 양념을 버무려 채워 넣을 수 있는 속이 꽉 찬 배추, 다시 말해 결구형(結球型) 배추가 이 무렵에 나왔기 때문이다.

속이 꽉 찬 배추는 아니더라도 고춧가루로 빨갛게 양념한 배추김치 또한 역사가 250년을 조금 넘는다. 18세기 중반의 문헌에 처음 보인다. 그러면 고춧가루 양념이 아닌 다른 배추김치는 언제쯤 먹었을까? 빨라야 조선 초다. 왜냐하면 배추가 이때부터 재배됐기 때문이다.

김치의 역사는 길지만 배추김치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생각보다는 길지 않은데 왜일까? 이유는 배추김치가 너무나 대단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옛날 배추김치는 ‘슈퍼스타’였으며 ‘위대한 탄생’이었던 까닭이다. 배추김치, 무엇이 그렇게 대단할까?

약 600년 전인 조선 초, 한양에서 배추김치 한 통을 담그려면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당시엔 재료가 제대로 없었으니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를 담그기란 쉽지 않았다. 속이 꽉 찬 통배추는 19세기 무렵에야 개발됐고 젓갈은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고추는 임진왜란 때 전해졌다.

그러니 대신 후춧가루로 김치를 담가야 했는데 그런 만큼 비용이 지금 돈으로 최소 수백만 원 내지 1000만 원은 들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식품이 종자 개량과 기술 개발, 경제 발전과 유통 혁신을 통해 대중화되면서 서민의 밥상에까지 오른 것이 지금의 배추김치다. 배추김치를 위대한 탄생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장용 배추김치 ⓒPixabay
김장용 배추김치 ⓒPixabay

배추는 원래 약이었다

배추김치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김치가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배추가 한반도에 전해진 시기는 고려 때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 간행된 <향약구급방>에 처음 보인다. 배추의 원산지는 중국으로 순무 종자를 개량해 배추가 된 것도 우리 고려 때인 송나라 무렵이다. 한반도에 바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엔 배추를 제사상에 올렸다고 나온다. 엄청 귀했다는 소리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종자를 중국에서 수입했기에 값이 비쌌고 재배도 많지 않았고 소비도 제한됐다. 주로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에서 약용 또는 제사용으로 쓴 값비싼 채소였다. 이랬던 배추가 조선 중기에야 양반층, 중상층에까지 퍼졌다. 1670년 간행된 <해동잡록>에 한양에선 사람들이 배추를 성문 밖에 심어 이익을 본다고 적혀 있다. 그만큼 배추 소비가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평민 계층에까지는 퍼지지 못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중반 이후에야 배추 보급이 확대된다. 한양 주변에 온통 배추밭이 들어섰고, 정약용은 자신이 직접 마당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무렵부터 일부 부유층과 양반들이 먹던 고급 채소 배추가 상당수 한양 주민들이 먹는 일반 채소가 됐다.

종합하면, 조선 초 동대문 훈련원 부근 왕실 밭에서 재배했던 특수 채소 배추가 왕십리 뚝섬 등 한양 외곽을 거쳐 19세기엔 경기도의 개성과 광주로 재배지가 늘어났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함경북도 경성까지 전국으로 확대됐다. 바꿔 말해 고려 말 조선 초에 전해진 배추가 50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대중화된 것이다.

고추, 최고급 향신료의 대체품

김치 양념의 기본은 고춧가루다. 고추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전해졌지만 식용으로 쓰인 것은 훨씬 뒤여서 고추장과 김치 등에 고춧가루를 넣은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문헌 중에선 <증보산림경제>(1766년)에 처음 보인다.김치를 왜 고춧가루로 양념했을까? 우연히 버무려보니까 맛있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고추가 전해지기 이전엔 김치를 어떻게 양념했을까?

김치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양념이 귀했으니 자극적인 채소로 담근 김치를 먹는 것이다. 옛날엔 그래서 갓김치와 파김치가 최고 인기였다. 또 하나는 후추, 산초, 생강 등으로 채소를 버무려 김치를 담는 방법이다. <산림경제>엔 후추는 물론 회향, 계피, 산초, 귤피를 양념으로 쓴 김치까지 보인다. 조선도 서양처럼 후추를 수입에 의존했기에 값이 비쌌다. 이런 향신료 김치는 극소수 부자만 먹는 호화 사치 식품이었다.

이런 고급 향신료를 대체한 것이 고추였다. 문헌엔 생강, 계피와 맛은 비슷한데 농촌에서도 구할 수 있다고 했으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고추를 통해 최고급 향신료의 대중화가 이뤄졌는데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김치였다.

젓갈 역시 김치 담글 때 필요한 필수 재료 중 하나다. 젓갈을 넣어야 숙성 과정에서 감칠맛과 시원하고 상큼한 맛이 나온다. 다시 말해 젓갈 덕분에 김치가 김치다워진다. 그러면 우리 조상님들, 언제부터 김치에 젓갈을 넣었을까?

젓갈 김치는 일단 15세기 조선 초 세종 때 보인다. ‘마른 고등어 두 궤짝과 새우젓을 섞어 담근 오이김치 두 항아리를 영접도감에게 보냈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기록으로 중국 사신이 황제에게 바치겠다며 새우젓 오이김치를 원했다는 내용이다. 16세기 문헌에도 보인다. 중종 때 박세평이라는 사람이 한성판윤을 역임한 이자에게 새우젓과 오이로 담근 석박지를 선물로 보내며 이 김치는 특별히 맛있으니 공이 필히 감동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별명이 감동스러운 맛의 김치라서 감동저(感動菹)라고 덧붙였다.

새우를 소금에 밀봉해 숙성시켜 만든 새우젓 ⓒ한국외식신문
새우를 소금에 밀봉해 숙성시켜 만든 새우젓 ⓒ한국외식신문

젓갈로 담근 김치, 그 감동의 맛

젓갈김치를 놓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었을까?젓갈이 귀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엔 중국에 젓갈을 공물로 보냈고 중국 사신도 젓갈을 선물로 원했을 정도다. 그러니 아무나 김치에 젓갈을 넣을 수는 없었다. 젓갈은 조선 후기인 18세기까지도 구하기 쉽지 않았기에 정조 무렵에도 사치품으로 여겼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기에 젓갈이 귀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데 여러 이유가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어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어획량이 적었고 어업 구조 역시 바다가 아닌 하천 어업이 중심이었다. 유통 구조상의 문제도 있다. 예컨대 18세기 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영남 사는 아이는 새우젓을 모른다’고 했을 정도로 동서 간 어획물이 유통되지 않았다.

이랬던 젓갈이 어떻게 김치의 필수 재료가 될 수 있었을까? 18~19세기의 어업 기술 발전과 유통 혁신으로 젓갈의 공급이 크게 늘면서 수요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엔 어업 기술, 그물을 비롯한 어망의 개선, 어선의 발달로 연안 어업이 활발해졌고 전국 각지에 대규모 어장이 형성됐다. 이곳에서 조기, 명태, 멸치 등의 어종이 산더미처럼 잡혔는데 물고기가 떼로 몰려와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그만큼 다양한 젓갈이 만들어졌다.

시장의 발달도 빼놓을 수 없다. 18세기 중반 이후 시장은 전국적으로 1000개 이상이 생기고 오일장의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젓갈 또한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보부상이 돌아다니며 산골 구석구석까지 새우젓, 멸치젓을 날랐으니 집집마다 김치에 젓갈을 넣어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됐다.

고급 약재이자 사치품 채소였던 배추, 후추를 비롯한 고급 향신료를 대체한 고춧가루, 감동스러운 맛의 젓갈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한국을 대표하는 맛을 내는 배추김치가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얼추 500년 세월이 걸렸다. 그 재료가 대중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니 역시 배추김치의 탄생은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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