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 인문학

[음식과사람 2024.02 P.72-75 Discovery]

어묵탕 ⓒPixabay
어묵탕 ⓒPixabay

editor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연포탕이 어묵탕의 뿌리?

한국을 대표하는 거리 음식으로 특히 겨울철에 즐겨 찾는 먹거리 중 하나가 어묵꼬치, 어묵탕이다. 또 다른 익숙한 이름으로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엔 주로 오뎅이라고 불렀다. 꼬치 재료로 들어가는 사각형 어묵은 덴푸라라고 했다.

이름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어묵꼬치, 어묵탕의 뿌리를 일본에서 찾는다. 실제 생선 살과 전분 등을 다져 만드는 어묵의 경우 우리 고유 전통식품이 아니라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어묵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것은 일제강점기 부산을 통해서라고 한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데다 바닷가에 접한 도시인 만큼 생선도 풍부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어묵공장이 많이 생겼다. 지금도 부산어묵이 유명한 배경이다.

이렇듯 어묵과 어묵꼬치, 어묵탕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어묵꼬치, 어묵탕이 돈가스와 카레라이스처럼 전적으로 일본 음식이 전해져 한국화한 것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전통 일본식 오뎅과 같은 음식이 있었고 이것이 지금 어묵꼬치와 어묵탕의 발달과 무관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유행했던 두부꼬치구이와 연포탕이 바로 그것인데, 어묵꼬치와 어묵탕이 한국인의 겨울철 국민음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엔 아무래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음식문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듭 말해 전통 연포탕이 있었기에 일본 음식 오뎅의 단순한 전래나 모방이 아니라 우리 특유의 어묵꼬치, 어묵탕으로 재창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어묵꼬치, 어묵탕과 연포탕 그리고 오뎅의 기원과 차이점,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일본 전통 오뎅의 뿌리는 된장을 발라 구운 두부꼬치인데 우리나라에도 진작부터 비슷한 음식이 발달했다.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친구들과 모여 두부를 꼬치에 꽂아 닭고기 국물에 지져 먹었다고 적었다. 

어묵 대신 두부를 꼬치에 꽂았을 뿐 지금의 어묵꼬치와 상당히 비슷하다. 국물에 지져 먹었다고 했으니 육수가 고급일 뿐 어묵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부에 된장을 발라 구워 먹었다는 점에서도 일본 전통 오뎅과도 닮은꼴이다. 이런 음식을 조선시대에는 연포탕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맑은 육수에 산낙지를 넣어 살짝 데쳐 먹는 낙지탕을 연포탕이라고 하지만 연포탕은 원래 두부탕이다. 연포(軟泡)로 끓인 국(湯)인데 연포가 다름 아닌 두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연포탕이 왜 전혀 관련도 없는 낙지탕을 가리키는 용어가 됐을까? 조선시대 문헌에 연포탕은 주로 닭 국물이나 소고기 국물에 두부를 넣어 끓인다고 나온다. 하지만 예전 바닷가 마을에선 닭고기나 소고기 대신 쉽게 잡을 수 있는 낙지를 넣고 끓인 두부장국을 낙지 연포탕이라고 했다. 그러다 두부값은 싸지고 대신 지천으로 잡았던 낙지는 오히려 비싸졌기에 두부는 사라지고 낙지만 남아 낙지탕이 연포탕이 됐다.

조선 후기 <산림경제>에 연포탕 끓이는 법이 자세히 보이니 옛날 연포탕이 지금의 낙지 연포탕과 어떻게 다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두부를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아 흰 새우젓국과 물을 타서 그릇에 끓인다. 그 속에 두부꼬치를 거꾸로 담가 슬쩍 익거든 꺼내어 넣고 따로 굴을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으면 보드랍고 맛이 월등하게 좋다.”

조선시대 연포탕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두부를 꼬챙이에 꿰어 닭고기 국물이나 새우젓 국물에 끓여 먹었던 음식이다. 일본 오뎅도 기원은 두부에 된장을 발라 꼬치에 꽂아 굽거나 간장 국물에 끓이는 요리에서 비롯됐다. 두부를 꼬치에 꽂아 굽거나 끓인다는 점, 겨울철 별미로 먹는다는 점에서 조선의 연포탕과 일본의 오뎅은 서로 닮은 점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혹시 조선의 연포탕과 일본 오뎅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관련 사실을 입증할 문헌은 없지만 두 음식이 너무 비슷하기에 떠오른 의문점이다. 물론 전혀 관련 없이 우연히 닮은 음식일 수도 있다.

일본의 '오뎅' ⓒPixabay
일본의 '오뎅' ⓒPixabay

일본 오뎅의 기원과 발달 역사

오뎅은 우리한테도 익숙한 단어다. 그런데 어원을 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뎅은 한자로 어전(御田)이라고 쓴다. 임금 어(御), 밭 전(田)자다. 하지만 일본 천황의 밭과는 아무 관련 없다. 뎅가쿠(でんがく)라고 읽는 전악(田樂), 즉 농악에서 비롯된 단어다. 일본 중세시대에 농부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밭에서 일할 때 노래하며 추던 춤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왜 음식인 어묵꼬치에 농민들의 전통 민속춤 이름을 붙였을까? 일본어 유래사전에 그럴 듯한 설명이 보인다. 꼬치에 두부를 찔러 끼워놓은 모습이 마치 옛날 농부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과 비슷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일본 문화의 배경을 모르면 꿈에서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작명이다. 어쨌거나 어묵꼬치의 모습에서 마치 풍년을 기원하며 춤추는 옛날 일본 농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일본에서 오뎅은 언제부터 발달했을까?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옛날 일본 오뎅은 지금과 달라서 어묵이 아닌 두부를 꼬치에 꿰어 된장을 발라 굽는 음식이었다. 두부에다 산초가루를 으깨 만든 된장을 발라서 구웠으니 초기 일본 오뎅의 원형은 두부 산적구이에 가깝다.

이런 두부 꼬치구이가 이후 생선으로 만든 어묵이 발달하면서 두부와 어묵, 곤약, 무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를 꽂아 굽는 요리가 됐다. 이어 임진왜란 이후인 18세기 에도시대 중·후반, 간장을 이용해 국물 맛을 내는 요리법이 발달하면서 오뎅탕을 비롯해 오뎅 요리가 다양해졌다.

그러고 보니 한국과 일본의 어묵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어묵 내지 어묵탕은 주로 거리 음식으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일본에서 어묵인 가마보코와 오뎅은 고급 요리로 발달했다. 고급 일식집에서도 오뎅이 메뉴에 올라와 있는 까닭인데 일본에서 오뎅과 어묵인 가마보코는 육식을 금기시했던 옛날, 사무라이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던 일본에서 전쟁을 해야 하는 무사계층에겐 핵심적인 단백질 공급원 역할을 했기에 상류층 부인들이 식사를 준비할 때는 어묵 만드는 전문 요리사를 따로 두었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일본인이 어묵을 대하는 자세는 남다르다. 사무라이 결혼식에 도미는 행운을 부르는 생선으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는데 여러 이유로 도미를 준비할 수 없을 때는 어묵으로 도미 모양을 만들어놓았다.

두부가 들어간 일본 음식 ⓒPixabay
두부가 들어간 일본 음식 ⓒPixabay

연포탕 음식문화의 현대적 재해석

현대의 어묵탕과 조선시대 연포탕 그리고 일본 오뎅, 세 음식의 닮은 점과 차이는 그렇다고 치고 현재 한국인이 어묵꼬치와 어묵탕을 좋아하고 즐겨 먹는 것과 조선시대 연포탕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조선 후기의 연포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직장인들이 퇴근 후 회식이나 친구들과 먹는 모임을 갖는 것처럼 옛날 선비들 사이에서도 먹자계가 유행했던 모양이다. 고기 구워 먹는 모임인 난로회가 있었고 청빈을 자랑하는 콩 음식을 먹는 모임 삼두회(三豆會)도 있는데 두부꼬치나 두부장국을 먹는 모임인 연포회도 상당히 유행했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에선 늦가을과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얇게 썬 두부를 꼬챙이에 꿰어 만든 꼬치를 기름에 부친 다음 닭고기와 함께 끓인 국을 연포라고 한다고 했으니 당시 연포탕 먹는 것이 한양의 풍속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문집을 보면 특히 사찰을 중심으로 수시로 연포회가 열렸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두부가 그렇게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일반 가정에선 명절이나 제사, 잔칫날처럼 특별한 날에 두부를 만들었다. 대신 절이 두부 공급처 역할을 했다. 

특히 제사용 두부 만드는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했고 전국에 51곳이 운영됐으니 두부장국, 연포탕 먹는 모임인 연포회를 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게다가 절은 산속 호젓한 장소에 있으니 늦가을 친한 벗끼리 나들이를 겸해 풍류를 즐기며 친목을 다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연포회도 처음엔 친한 선비들이 모여 두부를 굽거나 끓여 먹는 순수한 친목 모임이었겠지만 나중에는 각종 범죄를 모의하거나 부패의 수단으로도 이용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숙종 7년에 암행어사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어사 안후태가 가는 곳마다 술을 마시고 취해 길에 쓰러져 자다 행인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연포회를 베풀어 지방 관리들과 사귀며 공적을 부풀려 보고했다고 탄핵하는 장면이 나온다.

뒤집어 보면 날씨가 쌀쌀해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부장국, 즉 연포회를 먹는 모임이 열렸다는 것인데 좋은 음식 다 놔두고 왜 하필 연포탕이었을까?

영조 때 문헌 <증보산림경제>의 연포탕 만드는 법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연포탕은 겨울에 먹어야 좋다며 각종 고기와 기름에 지진 두부, 생강, 파, 느타리버섯 종류인 참버섯, 표고버섯, 석이버섯 그리고 밀가루와 계란을 넣고 초피가루,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고 했다.

지금이야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지만 18세기엔 하나같이 비싼 재료들이었다. 연포탕이 흔한 두부장국이 아니라 고급 요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연포탕이었기에 양반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을 것이다.

지금의 어묵꼬치, 어묵탕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 또한 두부꼬치가 어묵꼬치로 대체되고 값비싼 고급 재료가 대중적인 서민 재료로 바뀌었을 뿐 조선 선비들이 사랑했던 연포탕 음식문화가 현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돼 재창조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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