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사람> 5월호

[음식과 사람 2017-5 P. 65 Food  Essay]

 

식단은 바뀌어도 들밥은 살아 있다

 

▲ 이미지 = Pixabay


Editor. 윤동혁 프로듀서

 

중학교 3학년 때(1965년)로 기억한다. 모내기 일손 돕기… 도움이 되려나 싶었지만 아무튼 하루 수업을 통째로 빼먹으니 무지 기뻤다. 반바지 차림으로 논에 발을 내딛자 미끄덩 와닿는 촉감이 낯설고 좀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줄을 맞춰 모두 같은 속도로 모를 꽂으며 앞으로 한 발씩 나가다 보니 정신이 집중되면서 뭔가를 함께 만든다는 이른바 ‘협동정신’이 저절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감독 나온 선생님들은 현장학습 같은 개념은 전혀 없었다.

저 위에서부터 내려온 ‘명령’을 수행 중이었고,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인 채 함께 모를 꽂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막걸리를 들이켜다가 가끔 우리 쪽에 시선을 던져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우리나 선생님이나 꽤 순박하고 한가로운 시절이었다.

식사시간이 되었다. 아주머니 몇 분이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와 들길에 펼쳐놓았는데, 시뻘건 팥죽칼국수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반찬은 겉절이 김치와 묵은 깍두기. 많이 먹었고 꿀맛이었고 금방 소화되었으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다.

요즘 읍내 ‘미소진 식당’ 아주머니의 입꼬리가 방실방실, 식당 이름과 잘 어울린다. 백반이 전문인지라 ‘들밥 배달’이 급증해 민트색 경차를 몰고 쉴 새 없이 배달통을 나른다. 매일 바뀌지만 기본 반찬이 다섯 가지에다 김치 따로, 그리고 빈대떡 두어 장에 찌개를 곁들이고, 흔히 부르스타라 부르는 야전용 가스 불판도 싣고 간다. 10인분 이상만 배달 가능하다고 했지만, 뻔히 아는 처지에 8인분만 시켰다고 거절할 수는 없다. 반경 2km까지는 군소리 안 하고 배달해준다.

“밭일 하는 사람들은 기본이고, 요즘 귀농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공사 현장에도 많이 나가요.”

그러고 보니 펜션 같은 집들이 여기저기 예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예전하고 달라서 전화로 주문해놓고 식당에 와서 싣고 갔다가 일 끝나면 귀갓길에 식기 일체를 반납하고 가는 ‘수준 높은’ 고객들도 많다고 한다.

1990년 SBS 창사 팀으로 자리를 옮겼고,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로 <숨 쉬는 땅>을 제작할 때 들밥은 짜장면이 점령하고 있었다. (약간 비싸도) 짬뽕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날 논밭의 주인이 호인이면 잡채밥이나 탕수육을 더 시켜주면서 들판의 분위기를 따끈따끈하게 달구었는데, 물론 소주 몇 병이 따라왔다.

이때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을 목격했는데, 중국집에서 그릇 찾으러 오기 귀찮으니까 모든 음식을 스티로폼 그릇에 담아오는 것이었다. 식사 후에 깔끔하게 챙기지 않으면 그 가벼운 빈 그릇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개천에 박히기도 했는데, 요즘 중국집들은 ‘들밥 시장’에서 거의 퇴출된 상태라 스티로폼 그릇 걱정은 안 해도 되게 되었다.

10년쯤 전 전라남도 유기농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도 들밥에 관한 나의 관심은 뜨거웠다. 장흥이 주 무대였는데, 뱀이 나와서 막 돌아다니고 대숲에 들어가면 벌써 모기가 바글거리는 그 시기에 죽순이 마구 올라왔다.

행록 씨 부인은 그 대숲 속에 들어가 등산화 끝으로 죽순을 툭툭 걷어찼다. 그때마다 한 뼘도 더 되는 죽순이 통째로 쓰러졌고, 그걸 푹 찐 다음 보드라운 맨살을 길쭉길쭉 썰었다. 초고추장에 찍어주면서 죽순회라고 했다. 우리는 놀랐으나 들밥 먹는 일꾼들은 ‘이 무렵에 늘 먹는 음식’이라며 덤덤해했다.

그때 어느 들판을 나가도 베트남 처자들이 보였다. 우리에겐 별미인 모싯잎송편은 잘 안 먹고 잔치국수에다 열무김치 얹어 먹는 게 맛있다고 했다.

<들밥> 다큐멘터리를 오래전부터 제작하고 싶었는데 올해엔 이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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