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사람 2020.01 P.62-65 Discovery]

붕어빵 ⓒ위키백과
붕어빵 ⓒ위키백과

겨울 간식 열전…

붕어빵과 찐빵, 호떡의 인문학

이름으로 풀어본 붕어빵 족보

찬 바람 부는 거리를 걷다 보면 꽤나 다양한 겨울 간식들이 우리의 입맛을 유혹한다. 먼 옛날 조상님들도 즐겼을 듯한 뿌리 깊은 주전부리부터 해외여행에서나 먹어봤던 외국 간식과 퓨전 음식까지 별별 먹거리가 다 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언제 어디서 만들어져 어떤 경로를 따라 들어와 한국의 겨울철 거리 간식이 됐을까?

무심코 먹는 겨울철 간식의 역사, 알고 보면 그 속엔 생각지도 못했던 스토리와 사연이 담겨 있다. 겨울철 대표 간식인 붕어빵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이름 하나에도 우리 근현대 문화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붕어빵의 족보를 짚어보면 원조는 1909년 일본 도쿄의 나니와 빵집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도미빵으로 본다. 그리고 뿌리는 금속 틀에서 빵을 찍어내는 서양 와플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동양의 만두, 찐빵과 결합해 퓨전 음식으로 생겨났다.

와플은 중세 네덜란드어로 벌집이라는 뜻이다. 빵이 골고루 잘 구워지도록 틀의 무늬를 벌집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미빵은 왜 많고 많은 생선 중에서 도미라는 이름을 붙였고, 일본에선 왜 생선 모양의 빵틀을 만들었을까?

와플을 모방해 만든 최초의 빵틀은 생선이 아닌 돈 모양이었다고 한다. 이어 다양한 빵틀이 나왔는데 그중 생선 모양 틀에서 구운 빵이 대박 히트했다. 그리고 생선처럼 생긴 빵을 굳이 도미빵이라고 부른 이유는 전통적으로 일본에선 도미가 최고급 생선이었기 때문이다.

도미의 붉은색이 경사로운 색이고, 단단한 도미 머리와 지느러미의 가시가 무사의 갑옷과 투구를 상징한다고 해서 무사계층의 연회 요리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고급 생선이었기에 서민들은 값이 비싸 쉽게 먹을 수 없었고, 그래서 도미 모양의 빵이 나오자 대신 먹으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일본 도미빵엔 이런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잘 먹지도 않는 민물 생선인 붕어의 이름을 따 붕어빵이 됐을까? 먼저 붕어빵 변천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붕어빵은 일제의 영향을 받아 생겼지만 유행 시기는 밀가루가 흔해진 6·25전쟁 전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선 모양이었던 것은 아니다.

6·25전쟁 전후만 해도 단순히 둥근 풀빵이 대세였다. 풀빵은 들판에서 자라는 풀을 닮아 풀빵이 아니다. 밀가루 반죽조차 넉넉히 쓸 수 없었기에 도배할 때 사용했던 밀가루 풀처럼 묽은 반죽으로 구워 만든 빵이다. 풀빵이라는 이름 속엔 6·25전쟁 전후의 어렵고 배고팠던 시절의 사정이 반영돼 있다.

1950~60년대엔 국화빵으로 바뀐다. 사실 풀빵이나 국화빵이나 모양과 내용물은 비슷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빵틀의 꽃무늬와 밀가루 반죽이 조금 더 진해진 정도다. 그런데 왜 수많은 꽃 중에서 하필이면 국화빵이 됐을까?

정확한 이유야 아무도 모르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국화는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 조상님들이 무병장수를 소원하며 먹었던 꽃이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음력 9월 9일 중양절을 명절로 꼽았다.

이날 국화꽃으로 전을 부치고 국화차와 국화 술을 마시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2000년 넘도록 동양에서 널리 퍼졌던 문화다. 늦가을 무렵 거리에 나오는 국화빵의 이름 속엔 이런 배경이 있다.

1970~80년대부터 대세를 이룬 붕어빵에도 비슷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선 바다 생선 먹기가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꽁치나 명태 정도였고, 그보다 흔했던 물고기는 민물 생선인 붕어였다. 조금 더 고급 생선이 잉어였다.

생선 모양의 풀빵이 나왔을 때 일본처럼 도미는 한국인 정서에 썩 익숙한 생선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풀빵은 철저한 서민의 거리 간식이었기에 그 이름으로 고급 생선보다는 붕어와 같은 친숙하고 서민적인 물고기가 어울렸을 것이다.

도미도 아니고 잉어도 아닌 붕어빵이 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렇듯 풀빵부터 국화빵, 붕어빵까지 이름의 변화 과정에도 시대의 흐름이 반영돼 있다.

당나라 미인 양귀비의 마지막 요리, 호떡

호떡에도 상식을 뛰어넘는 뜻밖의 역사와 사연이 있다. 호떡은 떡은 떡이지만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 떡은 아니다. 흔히 구한말 임오군란 때 청나라 병사를 따라 들어온 화교가 전했기에 오랑캐 호(胡)자를 써서 호떡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정확하게 호떡의 뿌리는 중국이 아니라 중앙아시아다. 호인(胡人)들이 먹는 떡이어서 호떡이다. 여기서 ‘호(胡)’는 옥편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한 오랑캐가 아닌 서역에 사는 사람들이다.

지금의 중국 신장 지역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그리고 아랍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먹었던 음식, 그러니까 현재 아랍과 중앙아시아에서 먹는 난(Naan)이라는 빵이 호떡의 원조가 되는 셈이다. 이들의 조상이 먼 옛날 먹었던 밀가루 빵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호떡이다.

우리나라엔 임오군란 이후 근대 개화기 무렵에 전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조선에서 사신으로 중국에 오갈 때 도중에 호떡을 사 먹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당시 중국에서 호떡이 유행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다 호떡을 먹었겠는데 심지어 제사상에 호떡을 놓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 세조 때 대마도 도주한테 선물을 하사할 때 호떡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상식과는 달리 호떡은 조선시대, 빠르면 고려 이전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처음에는 거리 간식이 아닌 제사상에 놓는 제물이거나 임금이 하사하는 고급 음식이었다.

옛날 신문기사를 종합해보면 호떡이 지금 같은 간식으로 유행한 것은 1920년대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인들이 몰려와 호떡 장사를 하는데 불티나게 팔렸던 모양이다.

1924년의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당시 경성에 설렁탕집이 100개 있었는데 호떡집은 150개가 있었다고 나온다. 일제강점기 초반 중국 화교들이 한국에 몰려와 그만큼 돈을 벌어갔다는 이야기겠는데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도 그래서 생긴 말로 보인다.

남의 나라에서 돈 잘 버는 ‘왕서방’에 대한 질투에다 거들먹거리며 배타적인 화교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에 이웃집이 화재로 탄 데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희화화된 빈정거림이 내재된 까닭도 당시 시대 상황과 민족 감정이 포함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역의 음식인 호떡이 중국에 전해진 역사와 호떡이 퍼지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기록을 보면 호떡은 2000년도 훨씬 전에 중국에 전해졌다. <야항선(夜航船)>이라는 명나라 문헌엔 기원전 2세기 무렵인 한 무제 때 김일제가 전했다고 나온다.

김일제는 흉노의 왕자로 한나라에 항복한 인물이다. 왕자가 전했다는 이야기엔 호떡이 흉노에서도 왕족들이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호떡이 고급 요리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것이 기원전 2세기는 서역의 밀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이런 밀가루로 만든 호떡이고 흉노의 왕족이 먹을 정도로 귀하고 맛있는 음식이었으니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8~9세기 당나라 때는 호떡이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거리 간식은 아니고 서민들은 쉽게 먹을 수 없는 값비싼 고급 음식이었을 것이다. 호떡을 사 먹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렇다.

당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궁궐을 나와 놀다 식사 때를 놓치자 신하 양국충이 시장에서 호떡을 사다 바쳤다. 양귀비가 죽기 전 마지막 먹은 음식도 호떡이었다. 안록산의 난 때 현종과 양귀비가 달아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이때도 양국충이 시장에서 호떡을 사와 식사를 대신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치통감>과 <이십사사 통속연의>라는 문헌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양귀비와 중국 황제가 애써 구해 먹던 음식을 지금 우리는 길거리에서 일회용 컵에 담아 먹고 있으니 앞으로 호떡 먹을 때는 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호빵과 찐빵의 족보를 찾아서…

겨울은 호빵의 계절이다. 그런데 요즘 호빵 종류 참 다양하다. 전통적인 단팥호빵과 채소호빵에 더해 고기만두호빵과 커스터드&단팥호빵, 그리고 피자호빵에 에그호빵 등등 그 진화가 눈부실 정도다.

다양한 호빵이 쏟아지는 만큼 이제 호빵도 족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호빵인지 찐빵인지 고기만두인지 채소만두인지 심지어 슈크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음식에 무슨 족보냐 싶겠지만 음식에도 뿌리가 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 없는 것처럼 음식 역시 아무 바탕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호빵과 찐빵은 어떤 관계일까?

찐빵은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에 단팥을 소로 넣은 후 수증기에 찐 음식이다. 반면 호빵은 찐빵과 다른 별도의 식품이 아니라 그저 브랜드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네 분식집 등에서 만들어 팔던 찐빵을 1971년에 처음 가정용으로 대량생산한 식품업체에서 붙인 상표 이름이다.

일본에서 팔리는 찐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상품화했는데 겨울에 뜨거워서 호호 불며 먹고, 맛있어서 호호 웃으며 먹는다는 뜻에서 ‘호빵’이라고 브랜드를 정한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지금은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어쨌든 호빵이 찐빵의 상표 이름이었음은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왜 우리 찐빵을 일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가정용 찐빵으로 상품화해야 했을까?

일본도 찐빵을 먹는 데다 1960~70년대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우리보다 많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찐빵을 우리나라 간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사실 찐빵의 원조는 일본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선 오래전부터 찐빵을 먹었다. 찐빵의 시조는 고기만두로 만두의 동북아시아 전래와 관련 있다. 서역에서 발달한 만두는 중국을 거쳐 12세기 후반 이전 우리나라에 전해진다.

<고려사>에 고려 명종 때 만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반면 일본엔 14세기 중반 만두가 들어왔다. 원나라에 유학 갔던 류잔(龍山)선사라는 승려가 1341년 귀국할 때 현지에서 알게 된 임정인(林淨因)이라는 중국인과 함께 일본에 왔다. 임정인이 절에 머물며 고기만두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사찰에서 고기로 만두를 빚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선 승려는 물론 일반인들도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7세기 무렵 덴무(天武) 일왕의 살생 금지령 이후 일본인은 육식을 하지 않았으니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고기만두 대신 만두소로 무엇을 넣을까 궁리 끝에 일본인이 좋아하는 단팥으로 소를 넣어보자고 해서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찐빵의 원조다. 그래서 일본에선 찐빵을 팥소를 넣은 만두라는 의미에서 단팥만두, 즉 안만(あんまん)이라고 하는데 팥소인 앙코(あんこ)와 만두인 만주(まんじゅう)를 합쳐 만든 단어다.

육식이 금지된 일본에서 고기만두 대신 단팥만두, 찐빵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 무렵 단팥만두는 서민들의 간식이 아니라 왕이나 귀족, 신분이 높은 승려계층에서 먹었던 고급 음식이었다. 심지어 소문을 들은 당시 고무라카미(後村上) 일왕이 단팥만두의 맛에 반해 특별히 궁녀를 임정인에게 시집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발달한 일본 단팥만두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찐빵이 되고 호빵으로 발달한 것인데, 따지고 보면 호빵의 친척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 밤이나 호박 등을 넣어 차와 함께 먹는 과자로 발전한 것이 일본 화과자인 만주다. 만두와 만주가 똑같은 한자(饅頭)를 쓰는 이유다. 그리고 만두처럼 수증기로 찐 찐빵과 달리 서양 제빵 기술이 전해지면서 빵처럼 오븐에 구운 것이 단팥빵이니 호빵의 족보는 간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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