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액운을 막고 풍요를 기원하던 풍습

▲ 남영진 논설위원
(전)기자협회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부위원장
행정학박사

지난 2월 8일 정월 대보름이 지났다. 어릴 때 설날에는 맛난 음식과 세뱃값 때문에 맘이 설렜고 대보름엔 쥐불놀이 기대에 흥겨웠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난생처음 경찰 파출소에 끌려갔던 경험 때문에 지금도 대보름날엔 그때의 생생한 추억이 떠오른다. 고향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아버지가 산을 몇 개 가지고 있는 목상(木商)이셔서 역 앞 옥포동이라는 제법 큰 동네에 살았다.

대보름 달밤에 동네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제법 큰 추풍령천을 넘어 구교동 아이들과 투석전을 벌이곤 했다. 그날도 20여명의 아이들이 강변에서 돌을 던지고는 서로 이겼다고 소리를 지르다 5, 6학년 형들이 얼음이 언 징검다리를 건너가서 혼내주자고 제의했다. 우리도 따랐다.

건너가자마자 건너편에는 중학생 급의 형들이 버티고 있었다. 허겁지겁 바로 돌아오다 징검다리 바위틈에 흐르는 개울물에 빠지고 어느 친구는 신발 한 짝도 잃어버리고...돌아오자 강바람이 너무 추웠다.

쥐불놀이하던 깡통엔 불씨가 남아있었지만 땔감이 없었다. 누군가 강변에 새로 만든 포도밭 지주대를 뽑아 불을 때자고 제의했다.

1시간 이상 히히덕대며 몸을 녹이는데 면에서 유일한 의원의 조수가 순경을 데리고 나타났다. 구교동 쪽에서 밭 임자인 의사선생님께 알려줬는지 모르겠다. 모두 역 앞 지서(당시엔 파출소를 지서라 불렀다)로 끌려갔다.

파출소 주임이 ‘감옥’까지 들먹이며 겁을 주고 곧이어 교감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퇴학’ 운운했다. 겁이나 천장을 올려다보니 하얀 회벽이 왜 그리 높아보이던지(일제시대 건물이라 천정이 높아 작은 소리도 웅웅거렸다)...

자정이 다되어 아버지가 오셔서 소장과 몇마디 하고는 다 풀려났다. 당시 충북에만 통행금지가 없어 10여분 거리의 집까지 걸어오는데 아버지는 혼도 안내고 아무 말도 없으셨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얘기로는 교장선생님 파출소장 등이 다 아버지 마작친구여서 아버지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 주기로 했다고 한다.

▲ 고 이서지 화백의 쥐불놀이 ⓒ필자 제공
▲ 고 이서지 화백의 쥐불놀이 ⓒ필자 제공

이번 대보름 2, 3일 전부터 각종 카톡과 밴드에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과 음식에 관한 글과 사진이 넘쳐났다. 아파트 앞 행상에서 부럼용 땅콩과 호두를 펼쳐놓은 행상을 보고 대보름이 가까워 온 걸 알았다.

우한폐렴 여파로 주눅 들고 깜짝 추위로 움츠러든 마음에도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네이버로 한국민속신앙사전에 나온 대보름 세시풍속을 검색해봤다. 부럼 깨기, 오곡밥부터 약밥, 9가지 말린 나물먹기, 귀밝이술 등 음식과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고싸움, 농악 등 세시풍속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집에서 아내가 이번에는 오곡밥을 직접 해보겠다고 인터넷을 찾더니 이것저것 사오기 시작했다. 이틀 간 시루에 쪄 고생 끝에 보름날 늦은 ‘아점’을 좀 설은 찰밥과 말린 나물 반찬으로 맛있게 먹었다.

왜 오곡인가 궁금했다. 하얀 찹쌀, 노란 차조, 갈색 찰기장이나 갈색 찰수수, 붉은팥, 검은콩 등을 섞어 한해의 액운을 막고 풍요를 기원했다고 한다.

농사지은 곡식을 종류별로 넣은 것이다. 오곡에는 보리가 있지만 오곡밥에는 보리대신 팥을 넣는다. 찹쌀은 불려놓고 붉은팥은 약간 삶아 놓는다. 가끔씩 찬물을 뿌려 줘야 잘 쪄진다.

대보름날에는 다른 성을 가진 세 집 이상의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해 여러 집이 곡식을 내놓아 나누어 먹었다.

<동국세시기>에도 “정월대보름날에 오곡잡밥을 이웃과 나눠 먹는다. 제삿밥을 나눠먹는 옛 풍습을 본받은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시골동네에서는 이를 ‘모둠밥’이라 했다. 각 집에서 아이들 용으로 각종 곡식을 조금씩 추렴해 가마솥에 쪄서 김장김치와 함께 먹었다. 저녁에 큰 집에 20-30명의 아이들이 모여 모둠밥을 나눠먹고 백열전등 앞에서 담요천막을 치고 서투른 촌극을 보던 추억이 있다.

▲ 필자가 집에서 만든 오곡밥과 나물 ⓒ필자 제공
▲ 필자가 집에서 만든 오곡밥과 나물 ⓒ필자 제공

좀 있는 집에서는 ‘약밥’을 지었다. 찹쌀에 밤, 대추, 곶감, 팥 등을 넣고 꿀, 기름, 간장으로 버무려서 다시 찐 갈색 밥이다. 약밥은 대보름날 별식이었다.

약밥은 글자 그대로 약용이나 의례용, 주술용으로 먹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약밥이 아닌 밤 대추에 집 감나무에서 딴 감을 깎아 말린 곶감과 감 껍질을 넣어 ‘찰떡’을 만들었다. 썰매를 타고 오거나 쥐불놀이 후에 찬장에 굳은 찰떡을 잘라내 천천히 씹어 먹는 달콤함이 아직도 느껴진다.

대보름 아침 일찍 일어나 친구 집에 가 친구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도 사가”라고 하고는 즐거워했다. “내 더위 사가라”는 경상도 발음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일어나라는 경고일거다. 호두나 땅콩 같은 견과류를 나이만큼 깨어 먹는 ‘부럼깨기’도 내려온다. 부럼은 부스럼이란다. 어릴 때 모두들 부스럼, 뾰루지, 얼굴버짐, 머리버짐이 왜 그리 많았는지.

겨울의 영양부족을 기름지고 비타민이 많은 견과류와 오곡밥과 말린 나물로 보충하고 새 봄의 기를 맞으려는 배려 일게다.

이젠 집에서 할 필요가 없이 시장이나 마트에서 다 사다 먹는다. 요즘은 영양과잉이 문제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위협받는 것을 보면 적어도 건강과 보건 분야에서는 대보름날의 우리 전통인 ‘함께 나누기’ 정신이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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